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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라.”

출애굽기 20:13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는 언제나 가볍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관계 가운데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준 십계명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첫 번째 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물론 이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 할 수 없습니다. 인간 사회 구조의 기저(基底)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사람 개개인의 생명을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깔려있다는 것. 이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생명을 신성하게 하신다는 것, 그 생명의 지속성 여부도 주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다는 것, 다양하고 역동적인 생명 활동이 주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때문에 인간에게 부여된 생명의 제거는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생명의 단절인 죽음은 엄청난 결과를 낳기에 생명을 해하고 없이 하는 것만큼 심각하게 비인도적인 행위는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솔히 여기는 죄입니다. 단순한 문장으로 구성된 이 여섯 번째 계명은 아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만큼 분명하고 중요한 원칙, 인간의 생명에 대한 원칙이 들어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든 알지 못하고 잊어버린 사람이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것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혈연관계, 사회관계, 시민 관계를 다루는 이후에 나올 모든 계명은 사람에 대해 구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의 신성함, 소유권, 평판의 중요성, 인격의 우위 등 이런 모든 것은 비로소 생명이 있을 때에만이 그 효력과 가치를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것은 생명이 계속되고 있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생명을 주는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을 지닐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며 생명을 중지시키는 것은 모든 것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여섯 번째 계명은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 그 자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표시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생명을 주신 이에게 그것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리가 귀속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히브리어의 의미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가진 살인, 계획된 살인을 금하고 있습니다. 고의가 아닌 죽음이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민수기 35장 9-34절에 나오는 도피성에 대한 규례는 살인의 실제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나타내 보입니다. 죽이는 것과 살인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단어는 신명기 본문에서 ‘뜻하지 않게’(비의도적인), ‘그릇’(실수)이라는 말입니다. 실수로 우연하게 동료 인간의 생명을 없이 한 사람은 이 도피성 가운데 하나로 들어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의 고의성이 드러난다면 도피성이라도 그들을 보호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고의에 의한 살인이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것이든 그 죄가 가볍지 않다는 점입니다. 고살한 사람은 물론 법에 의해 처벌을 받지만 실수로 인한 치사도 정해지지 않는 기간 동안 자유를 잃고 도피성 안에 갇혀 살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위험을 무릎 쓰고 도피성의 울타리를 벗어난다면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살해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법은 그 살인 행위 자체를 반대합니다. 이 계명이 간단하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 적용 범위가 매우 넓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때문에 이 계명은 절대로 어떤 특정 계급에만 적용되는 법령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 사람이 상류 사회의 생활을 누리고 있든지, 인생 밑바닥의 삶을 살고 있든지, 그것이 사람의 생명인 까닭에 고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자는 사회적인 지위가 어떻든지 살인자입니다. 권력상의 특권이나 가난 같은 특수한 상황을 구실로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개인이나 사회 혹은 국가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것이 살인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면 이 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여섯째 계명은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간생명의 존중을 위한 법제도 안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르쳐 주신 여섯째 계명에 대한 교훈은 당시만 아니라 오늘 날에도 마음 깊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명을 파하지 않으시고 완전하게 하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목회자들과 그것을 듣고 아멘으로 인정하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완전하게 죄인 된 모습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확대시켜 적용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죽이는 모든 것은 살인한 것이며 심지어 화가 치밀어 오른 나머지 해서는 안 될 욕이나 저주등도 살인죄에 포함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저희에게 내리게 하시기를 원했을 때, 그들이 공적인 목적을 위해 생명을 멸하려는 일을 꾸짖으셨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는 위기 상황에서도 베드로가 검을 사용한 것에 대해 책망하시며 “검을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었더면 내 종들이 싸웠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친히 행동과 교훈을 통해서 전쟁을 예외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약하고 억압 받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종종 주장되었습니다. 확실히 그럴 듯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의 표준을 아주 세련되고 교양 있는 이교의 사상에서 취하질 않고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취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제시 한 인용문들에서 주님이 전쟁을 공공연히 비난하셨던 바로 그 때가 일찍이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사악한 연합 세력이 횡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세력에 대해 주님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가능성이 암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경우에 행악자를 처벌하거나 압제자에 대항하여 싸우심으로써가 아니라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승리를 얻으셨습니다. 어떤 상황 하에서라도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지혜로운 태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전쟁이나 사형 외에도 여러 형태의 살인이 있습니다. 특별히 자본주의를 따르는 이 시대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와 같은 살인은 거의가 ‘살인’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때때로 인간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진범을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해 가하는 압제는 곧 살인입니다.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좋지 않은 약품을 사용하고, 검증되지 않는 살충제를 흡입하게 합니다. 한국에서 수년간 논란이 되었던 가습기 세정제와 여성들의 생리대에 몸에 해로운 성분을 함유한 것이 드러나고 피해자가 속출했는데도 정부와 기업이 묵살하고 있다가 문제가 붉어지고 확산되자 시비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많은 피해자들이 승소하는 일이 생겼고 그 때까지 기업과 정부는 이 일에 대해 모른 채 하고, 피해를 키웠다는 악평만 듣고 말았습니다. 도자기 제조 공장에서는 납중독 희생자들이 생겼고, 반도체 생산 공장에서는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백혈병이 걸려 죽음을 맞이하거나 사경을 헤매는 이들이 있지만 기업주는 책임을 회피하고 이윤만 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분명 살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한 가인의 파렴치한 항변은 오늘날에 와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품고 있는 감정입니다. 기업을 가진 사람뿐이 아닙니다. 크든 작든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다고 믿는 힘을 사용하여 압제합니다. 그것이 폭력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게 포장된 것이든 당사자는 고스란히 그 힘을 통해 상처를 입고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음을 경험합니다. 살인입니다.


이러한 살인에 대한 개념적인 확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나타나고 주님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의 팔복산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나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는 살인의 범위를 보다 확대하여 그것이 숨어 있는 자리 곧 화(anger)에까지 추적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 중 누군가가 노여움을 품은 채 생활한다면 그 사람은 심판을 받을 위험이 있고, 그 노여움을 터뜨려 경멸하여 “라가”라고 욕하면 그 사람은 “공회에 잡힐” 위험, 즉 징계를 받을 위험이 있다고 단언하십니다. 또 그 사람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뜻인 “미련한 놈”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예 생각해 볼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자기 형제에게 노여움조차 품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화를 품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공의로움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는 화를 품을 수 있고 또한 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죄에 대하여 품는 화는 죄인에 대해 품는 화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모든 공격력은 죄를 향해야 하지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하에서는 사람이 살의를 품으면 그것은 살인으로 간주됩니다. 주께서는 언제든지 다른 모든 사람의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을 일으키셔서 사람의 생명을 통해서 영적 승리를 거두십니다. 때문에 교회가 이 시대의 여러 가지 궤변에 넘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역행하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많은 운동들을 무서워하거나 속아서 그 일에 가담 하는 것을 철저하게 반대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해드린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세상에는 아주 훌륭하고 논리 정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많은 사상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과 기독교 사이를 아주 명백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천둥과 번개가 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산에서 선포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으신 자이신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선포된 계명보다 더 엄중하고 구속력이 있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시대 내내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이 전장에서 살해되거나 사회의 이름으로 매장되며 혹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당할 때마다 주님은 다시 고난을 당하고 주님의 교훈은 짓밟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단순한 사실들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 생명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취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특권이라는 것. 따라서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정하신 명령에 의해 그 일을 하도록 직접 위임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것. 그러나 오늘날 은혜의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은 그 권리를 사람에게 위임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십시오.


여러분에게 드리는 숙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여섯째 계명을 생각하면서 질문에 답을 해보며 사는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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