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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누가복음 17장 11~19절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숲에서 길을 잃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행히 그는 그 일에 대해 경험을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숲 속에서 두려워하고 얼마나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지 말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니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 전에 가이드가 와서 나에게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남자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매일 그들에게 주시는 많은 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깨어나서 해가 비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새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들을 수 있는 복을 주셨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소소한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쉽게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매일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을 불평하는 사람들은 즐겁게 그 음식들을 장만할 때를 잊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 직장을 찾았을 때 기뻐하던 일을 잊고서 일에 대해 불평을 쏟아 냅니다. 자신들이 일 할 수 있는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도 쌀겨가 바람에 날려버리는 것처럼 잊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세계 많은 사람들이 한 달에 벌 돈을 한 순간의 유흥비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셨고, 당신이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한 복 주심에 대해 바르게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 심지어 더 나은 복을 얻기 위해 경험하는 ‘어려운 일’에 대해 별것 아니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 주심에 우리가 할 적절한 응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이야기에서 그 적절한 응답의 모습과 부적절한 모습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에서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열 명 가운데 오직 한명이 바르게 대응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복 주심에 응답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그럼 먼저 우리의 모습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는 열 명의 나병환자처럼 하나님과 다른 사람 앞에서 부정(不淨)하였다는 점입니다. 나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두렵고, 죄의 그림자로 여겼습니다. 나병은 분명 깨끗해지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눅17:14, 17). 나병환자는 부정(不淨)하다고 여겨졌고, 종교공동체와 공적인 예배에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때까지 격리되었다가, 치료 후에 제사장에게 가서 정화의식을 거치게 되어 있었습니다(레14). 오늘 예수께서도 열 명의 나병환자들에게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


사실 나병은 성경에서 광범위한 피부질환을 의미합니다. 가장 나쁜 형태는 우리가 진짜 나병이라고 부르는 ‘한센 병’입니다. 이 경우 양성으로 판정을 받아도 1~3년 정도의 치료기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나병에 대한 의학적인 기술을 보면 한마디로 죽음으로 향하는 오랜 기간의 고통입니다. 짧게는 9년 길게는 20-30년 동안 육체적 심리적 고통 가운데 있다가 결국 죽는 병이라고 기록된 것도 있습니다. 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나병환자는 사실상 사형수처럼 취급받았다고 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 사람이 그 가족과 사회와 단절되도록 규정했습니다. 그들은 찢어진 옷을 입어야 하고 머리를 감싸고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말하면서,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과 거리를 지키라고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예수께서 만나셨습니다. 만일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것처럼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을 뺀 나머지 아홉이 유대인이었다면, 전통에 따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으로서 함께 하지 못할, 상종 못 할 서로가 “부정한” 나병으로 각자의 사회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영적으로 나병환자인 상태였던 우리 모두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마음이 거짓되고 절망적인 것을 보시고(창6:5-6; 렘 17:9),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나병환자로 자신을 진단하고 스스로 인정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나병이라는 끔찍한 질병이 나병환자를 지역사회에서 분리시킨 것처럼 죄는 인간 관계에서 거리를 두게 하고 분열을 일으킵니다. 하나님만이 두려운 나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죄의 끔찍한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자유하게 하고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나병환자로서 우리의 참된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 주된 이유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는 결국 잘못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끔찍한 죄인이 아닙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향해 말한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놓쳐버렸습니다. 라오디게아의 미온적인 교회는 스스로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부유해졌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나병환자들이 만일 “우리가 아프지만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닙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예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울부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한 “죄인”임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주님 앞에서 “나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두 번째 단계로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푸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일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했던 일입니다. 나병은 때로 성대를 공격해서 소리를 내는데 어려움을 겪게 합니다. 그들의 소리는 바람과 배경에 뒤섞여 거의 들리지 않을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들의 계속되는 울부짖는 소리에 귀가 먹은 예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이름으로만 알았지만 그 권위를 인정하고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Master라고 번역했습니다. 선생님 혹은 주님으로 부른 것은 예수를 권위 있는 사람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주권적 권위 아래에서 적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위치가 어디 인지 분명히 알아야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대할 때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자비는 우리가 구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환자이지만 우리는 꽤 좋은 이들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치유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치유 받을 수 있는 자격이나 칭찬받을 요소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하게 주님의 크신 자비에 호소할 뿐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주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2-13).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간청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그 앞에 지나가시면서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6~7)”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하심은 죄에 대해 심판을 요구하지만 주의 자비는 그 심판보다 더 먼저 반응하셔서 자비를 구하는 이들에게 그 은혜를 나타내 보이십니다. 무엇이 필요하든지 주를 찾으십시오. 주님은 자비로우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나병환자가 반응하면서 예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였다는 것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삶 곧 순종의 삶을 뜻합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제사장에서 가서 보여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단순히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만 명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의 상황은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한 상황과 유사합니다(왕하5:10-15). 치유의 증거가 없는 것은 믿음에 대한 시험인 것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토론이나 아무 논의도 없이 예수님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본문에 아무런 기록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정황이 있었는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가다가 자신들이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한 명, 또 한 명 치유가 되는 상황이었다면 다음 순서는 ‘나야 나’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열 명 모두 한꺼번에 치유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의 영혼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즉시 우리를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리신 속죄제로 정하게 하시고 의로 덧입게 하셔서 정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십니다.


남겨진 영혼들을 위한 하나님의 치유를 받는 유일한 조건은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조건입니다(요3:16).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지식적으로 주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에 대해 개인적인 순종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모두 구원의 신앙을 나타내 보이지만, 예수님을 그의 구원자요 참 구주신 것을 고백하고 나아온 한 사람에 비하면 구원의 믿음에 못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다른 아홉 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었을 뿐 더 이상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혼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치유함을 받고 유익함을 얻었지만 온전한 믿음으로서 구원받게 되는 일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17:19). 한 명의 이방인 나환자였던 사람만이 감사를 드리며 가장 높은 경지의 믿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은 주님께서 돌아와 감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한 나환자처럼 응답해야 합니다.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발 앞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가 비록 사마리아 사람으로 유대인에게 멸시받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구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크게 울렸습니다. 그의 찬양은 그의 목소리가 회복되었다는 증거였고, 완전한 자유의 외침이었습니다. 남이 어떻게 평가하든지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언급은 두 번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17:15, 18).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에 대해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칭찬하는 것이 됩니다. 그분을 높이고 다른 이들에게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 때문에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영적으로 큰 어려움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며, 어려움을 낳는 것은 주님의 축복입니다. 어려움은 거의 항상 우리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것을 보게 하기 쉽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구원이 거기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챔버스 묵상 1월 22일).


“주님을 찬양하라”는 시편의 말씀이 교회의 슬로건으로나 쓸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야합니다. 그것은 명령입니다. 내 인생에 주님께서 주시는 많은 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나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주심을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발아래서 시작합니다. 적절한 예배장소를 의미하기도하는 주님의 발 앞은 우리의 마음을 올려드리고 주님을 바라보기 좋은 장소입니다. 철저하게 낮아진 자세로, 주의 자비에 감사하면서 오직 주님의 일만을 높여드리는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였던 그 사람처럼 주님의 발 앞에 할 수 있으면 오래 오래 머물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보살핌 속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합시다. 그리하여 언제나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착한 일을 하며 궁핍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이러한 제물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히브리서 13장 15~16절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매일 우리는 영적으로 나병을 겪었을 때 그분 앞에서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하신 모든 일에 감사해야합니다. 그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 수 있을까? 실천적인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적인 접근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보다 확실한 것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습관화 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경험을 나누어 보십시오. 그것은 믿음을 나누는 행위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일로 찬양을 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에게 다시 그 일을 나누십시오. 착한 일과 나누고 섬기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쁜 일이며 믿음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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