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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마태복음 11:16~19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Matthew 11:16-19

16 “To what can I compare this generation? They are like children sitting in the marketplaces and calling out to others: 17 “‘We played the flute for you, and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and you did not mourn.’ 18 For John came neither eating nor drinking, and they say, ‘He has a demon.’ 19 The Son of Man came eating and drinking, and they say, ‘Here is a glutton and a d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But wisdom is proved right by her actions.”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인간의 발달에 따라 붙여진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현생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 라고 불립니다. ‘지혜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18-19세기에 인간 자신들을 향해 합리적 사고를 하는 존재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은 합리적인 혹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고, 다른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Ludens)”입니다. 그는 같은 이름의 책에서 신화나 종교 혹은 철학이나 예술 혹은 현대 스포츠의 놀이적 요소를 찾아내고 인간이 놀이에 대한 진지성을 추적하였습니다. 즉 놀이하는 ‘유희의 인간’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놀이는 인간에게 중요한 삶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호모 루덴스’가 인간의 명칭으로 비록 나중에 기록되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도 놀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진지한 통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시던 때에도 아이들의 놀이는 매우 진지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이들이 장터에서 노는 모습 가운데서 당시 세대를 관찰하셨고 그것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나누셨습니다. 세례요한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설교에도 아무 반응이 없던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답한 마음은 이런 질문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이 세대’라고 하는 두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대체로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세대는 뿌리가 같은 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세월 혹은 동시대의 사람들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보통 30년이 그 기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는 요한과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 배경은 ‘아고라’ 라고 불린 “장터”입니다. 아고라는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며 장이 서기도 했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놀던 아이들의 모습에서 당시의 세태(世態)를 살피신 것입니다. 무슨 놀이를 하자고 해도 함께 어울리기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 시대 사람들의 패역하고 완악한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은 즐겁게 놀이를 청했던 모습과 슬픔의 모습을 대조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이 바로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이라고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아주 대조적인 삶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두 다 그들을 거절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의 말이 귀신들렸다 하더니” 요한의 메시지는 즐거운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장례식의 엄숙한 모습이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와서 먹지도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귀신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사람들과 그냥 함께 잡수셨는데 먹기를 탐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냥 함께 마셨는데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원어를 통해 본 이 말은 너무 심하게 표현한 것으로 ‘포도주에 잠긴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


당시의 유대인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세례요한에 대해서 진지하게 그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삶 자체가 사람들을 향한 하나의 메시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슬픈 일을 당할 때나, 엄청난 재난을 당할 때는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지요. 요한이 밥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금욕적인 삶을 통해서 지금 이 세대는 밥 먹고 포도주 마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가?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시대에 그렇게 안일하게 살 수는 없다고, 밥먹는 것도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포기한 것입니다. 그의 삶이 전할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해야 하는 회개의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일상적인 삶 대신에 메뚜기와 석청을 먹던 요한은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 신속히 뉘우치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메시지로 바꾸어 전했던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의 메시지와 삶은 죄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는 무시무시한 메시지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있다고 사람들을 내몰았습니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보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꺼려했습니다.


그런 반면에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는 세례 요한과 다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메시지에 합당한 삶을 사셨습니다. 요한과는 대조적으로 평범한 사람처럼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잔치에, 그것도 결혼잔치에 참여하시고 적극적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에 흥을 더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번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동네마다 다니시며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이야기까지 하시면서 나의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던 세례 요한에게 귀신들렸다고 하던 사람들은 이제는 예수를 향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에 잠긴 사람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장례식의 슬픔으로 상징되는 세례 요한의 금욕적인 회개의 요청과 마찬가지로, 결혼 잔치와 그 즐거움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삶도 그들에게 거절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회개를 촉구해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함께 앉아 즐기기를 요청해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나눠야 할 즐거움과 슬픔에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미쳤다고 거부하고, 하나는 부정하다고 배척했습니다. 경건하면 너무 경건하다고 수군수군, 어울려 지내면 어울린다고 비방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여러분 믿으시겠습니까? 수십 세대가 지난 지금도 ‘놀이의 상황’에서 아이들이 모여 놀자고 제의 하는데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 결혼식 놀이를 하자 내가 피리를 불 테니 춤출래?’ 싫다고 합니다. ‘그럼 장례식 놀이라도 할래?’ 그것도 싫다고 합니다. 이래도 저래도 안 된다는 말로 거부하면서 상대를 비난하는 소리만 커갑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 세대를 정의하는 이 말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 시대의 역설, 제프 딕슨의 글 참고 )


오늘 우리의 세대를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누가복음 11:29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대’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의 완고함과 패역함과 불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라는 말을 쓰심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의 패역에 동참하는 당대 사람들의 성격을 규명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대’는 예수께서 하늘나라의 구원으로 초대했으나 그 초대를 거부한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의 패역과 완악함과 불신을 책망하신 말씀이자 오늘 우리 세대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깊은 울림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격한 감정을 다스리며 도대체 이래도 받아들이지 않고, 저래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고 결론 맺으십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삶을 통해서 보이신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녀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인 삶에서 세례 요한을 만나본적이 있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었기에 요한은 일반 사람들처럼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회개의 삶을 호소하였습니다. 그의 비전은 자신의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면서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무한하고 그 역동적인 개방성에 의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의 반응은 거부 아님 배척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새로운 기쁨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과 함께 어울리신 것은 우리의 삶을 축제로 만들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은 날마다 축제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근근이 견디는 삶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사는 무의미한 삶이 아닙니다. 날마다 한숨 쉬는 불행한 삶도 더더욱 아닙니다. 순간마다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세상은 장례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축제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서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꿈꾸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참고- ‘우리 시대의 역설’ / 제프 딕슨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책을 적게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주며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서두르는 것은 배웠지만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엄청나게 일을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자유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맞벌이가 늘어나지만 이혼은 늘고

집은 근사해지지만 가정은 깨지고 있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기쁨은 줄어들었다.

식품은 다양해졌지만 영양가는 줄어들었다.


수많은 컴퓨터를 설치하여 더 많은 정보를 얻지만

소통은 더 줄어들었다.

아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친구는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기저귀

더 많은 광고 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더 많은 약들

쇼윈도에는 수많은 상품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저장고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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