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환대
7월 2일 성령강림 후 제4주/녹색, 맥추감사주일.
마태복음 10:40~42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기독교로 개종을 한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희 부모님과 저와 동생은 하루아침에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절에도 다니고 굿하고 점치는 사람을 찾아다녔던 불교신자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에 다녀와서 절밥을 먹고 맛있다고 또 오겠다고 했었는데... 전에는 불가의 승려들은 가가호호 시주(施主)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다른 집은 문도 안 열어주고 문전 박대하는데, 저희 집에서는 없는 살림이지만 흰쌀이나 보리쌀 한 바가지씩 시주하고 때로는 천 원짜리 혹은 오백 원짜리 지폐를 곱게 펴서 드리곤 했습니다. 더우면 앉아 가시라고 권하기도 하고 추우면 들어와서 언 몸을 좀 녹이시라 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당연지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할 도리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바보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면 오히려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마음을 닫고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을 영접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스스로에게 갇혀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악순환은 결국 개인뿐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어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사고를 하는 지도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 나라와 그 지도자뿐 아닙니다. 세계 속에서 이러한 닫힌 마음의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조차 닫혀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같은 말씀으로 양육 받고 같은 공동체 안에서 자라 가는데, 서로 서로 마음이 닫혀져 있어서 용납하지 않고, 미워하며, 마음으로부터 싫어합니다.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닫혀져 있게 된 것일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부재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열린 마음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닫힌 마음이 됩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나 의인 혹은 소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을 열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안으면 그들을 보내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이 닫혀져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고 사랑하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선명하게 볼 수 없습니다.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합니다.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합니다. 자신만의 세계 속에 갇혀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닫힌 마음은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습니다.
닫힌 마음은 ‘합리화’라 부르는 과정을 통해 정신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기 정당화입니다.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나를 속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닫힌 마음은 이해 부족과 어두워진 정신을 만들어냅니다. 닫힌 마음과 속박은 늘 함께합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의 욕망에 매인 “죄의 종”이 됩니다.
닫힌 마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닫힌 마음을 지닌 사람이 성공하면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이들을 원망합니다. 닫힌 마음은 신비함과 경이에 대해 무감각합니다. 신비함과 경이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망각한 사람은 자신이 그분 안에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감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함도 받을 수 없습니다.
닫힌 마음은 유배생활을 하게 합니다. 자기에게 사로잡혀 현실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함께 아파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거나 없기에 과시를 위해 자선을 베풀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의 고통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의에 대해서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을 때는 우리가 껍질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껍질 속의 생명이 온전한 생명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그 껍질을 깨고 나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마음의 부화(孵化)입니다(요3-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이것은 곧 자아가 하나님 현존에 대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인적 차원에 대한 포괄적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미지가 하나님 앞에서를 뜻하는 ‘코람데오’입니다. 껍질 속 세상에서 깨고 나오는 부화(재탄생)의 경험이 오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열린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마음이 열리면, 눈앞의 사람, 앞에 펼쳐진 풍경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엡 1:18)으로 볼 때, 우리는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밤으로부터 낮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열린 마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열린 마음은 자연의 경이와 신비를 생생하게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마음이 열리면 모든 것이 달리 보이게 됩니다. 변한 것이 없는데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사물을 보는 나의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의 지경입니다.
열린 마음은 감사와 함께 있습니다. 열린 마음은 함께 아파하는 마음과 정의를 위한 열정과 함께 갑니다. 열린 마음은 세상의 고통과 수난을 느끼며 그에 대해 응답합니다. 연민과 정의를 위한 열정은 열린 마음과 함께 하는 윤리적인 자극이며 명령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갑니다. 그 성품은 한 마디로 자비하심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고린도교회에 가르쳤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자비를 실천하면 할수록 절망에 빠집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변화입니다. 알에서 나와 부화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확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삶 자체의 변화가 실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저는 환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환경을 대하고 사건을 대하면서 늘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 드리면 함께 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 주님의 성품, 자비로움으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시편 기자처럼 "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 10)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환대가 언제나 어디서나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함께 살아가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