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산다는 것은
성령강림절후 셋째 주일, 순교자기념주일 설교
로마서 6:1~1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평강의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뉴욕성화교회에서 매주일 아침마다 두 번씩 인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네 맞습니다. “평강의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예배 시작 전에 서로 이 인사를 하고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 설교시작하기 전에 여러분과 제가 다시 이 인사를 합니다. 야외예배를 드릴 때에도 가정에서 심방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인사를 나누는 것이 우리교회 인사법이라고 할 정도로 계속해왔습니다. 조금 전 설교 시작할 때에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인사를 왜 시작했는지 아십니까? 그냥 목사님이 하라고 하니까, 교회 주보에 쓰여 있으니까 라고 하기에는 오래 동안 이 인사를 해왔습니다.
구약성경의 ‘샬롬’, 신약의 ‘에이레네’는 단순히 평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바라는 ‘샬롬’, 혹은 ‘에이레네’는 전인적 인간의 충족상태와 물질적이든 영적이든 완전한 이상적인 충족상태를 의미하기에 축복이며 동시에 의무가 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우리에게 평안과 평화를 만들어갈 의무가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믿는 우리들은 peace maker로서 적극적인 평화의 창조자 역할을 해야 함을 말합니다. ‘샬롬’의 어원적인 뜻은 ‘대속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실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안은 대속(代贖)한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이렇게 평화의 인사에도 담겨져 있는 그리스도 대속의 의미가 오늘 본문에도 녹아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읽은 그대로 느껴지고 깨달아지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죄와 은혜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변함없는 은혜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지은 죄가 크다면 그것 그대로 더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일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가 얼마나 크든지 그 것보다 더욱 크기에 은혜로 덮고 용서 받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로 시작하는 본문은 이제 죄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로 말씀의 주제를 바꾸고 있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해 계속 죄를 지어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는데 다시 죄의 길로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와 함께 죄에 대해 죽었다가 다시 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전의 삶과 질적으로 영적으로 다릅니다. 때문에 죄에 죽은 우리는 다신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사람으로서 새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함께 죽었던 우리도 다시 살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에 대하여 죽으셨고 다시 살아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선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의 사욕(evil desire)은 우리를 죄를 짓도록 강력하게 요구하고 유혹합니다. 심지어 예수께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달고 세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죄에 빠질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에 대해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와 투쟁해야 합니다. 죄와 피 흘리기기까지 싸워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죄의 유혹은 항상 우리를 따라 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죄는 결국 사망, 하나님과의 단절을 낳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곁에 가지 마시고 죄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고 승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또한 불의를 행하는 무기로 우리를 죄에게 내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무기라고 표현한 것은 보다 적극적인 수단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 몸을 제어하지 않으면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지는 것과 같게 됩니다. 때문에 자신을 성찰하고 나의 죄의 성품을 인정하며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맡기고 스스로 삼가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 가십시오. 그리고 철저하게 주님께 자신을 드리고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드려진 자로 살아서 의의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의의 무기가 되어서 죄와 싸우고 의의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이로써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이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 값을 주고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 인사에 담겨진 의미처럼 구속함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이 한 주간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