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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누가복음 20장 34-38절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평강의 왕이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근래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쉼’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뉴하이드파크 제일장로교회(PC of N. H. P.)에 창립기념예배에 참석하였고, 오늘은 이곳 Seven Lakes 지역에 와서 심신을 정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옛 선조들은 자연경관을 보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다졌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우리의 조상들이었지만 자연, 조물주의 솜씨를 통해 자유스럽고 유쾌한 마음을 얻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자연을 주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를 둘러 만들어 주신 자연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곤경에 빠뜨리고자 사두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여겼고 육체의 부활과 영(spirit)을 믿지 않았습니다. 현실주의자라는 별명을 가진 사두개인들은 신명기 25장에 나타난 계대결혼에 대한 모세의 율법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모순점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나온 계대결혼은 남편이 자식 없이 죽을 경우 시동생과 그 과부가 재혼하도록 하는 관습법입니다. 재혼을 통해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자손을 잇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배경에는 당시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 후에도 현재의 삶을 계속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때문에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합리적이면서도 당시 상황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과 부활이후의 삶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저세상과 부활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고 천사와 같은 삶을 사는데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갑니다. 당신들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당신들이 정경으로 여기는 모세오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바는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문법적으로 말하면 문장은 현재형을 사용해서 지금도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유한한 눈으로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하면 죽어서 진토(塵土) 되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없는 존재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그들은 지금도 산 존재-생존(生存)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살아있는 관계 즉 양자가 모두 살아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영존하시는 하나님에게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되십니다. 육적인 몸이 있고 이 세상에서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변혁 없이-갱생, 중생체험 없이 살아간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교제가 있을 수 없게 되어서 살아도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해도 중생한 이들은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가 지속됩니다. 그들은 산 사람들이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밤에 찾아와 영생에 대한 질문과 답을 담고 있습니다. 중생하여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는 심판으로 인한 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진 세례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점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는 심판을 받아 이미 사망한 것입니다. 생명과 사망의 기준은 육신의 호흡에 있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달려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죽었습니까? 살아있습니까?

어린 아이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종종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개구리 반찬으로 아침을 하는 여우에게 묻습니다. 살았니? 죽었니? 죽었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산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왜냐면 잘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우리의 생명-영생이 달려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 세상에 속해야 합니다. 중간에 다른 세계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여긴다면 죽음을 끝으로 여길 것입니다. 육체의 호흡이 끊어지고 뇌의 기능이 정지된 것이 세상의 마지막이라면 주님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별할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주님이 오셔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하게 저 세상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릴 위해 오셨고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스스로 복음(福音)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에게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십니다. 이모든 말씀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지금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다면 분명히 오늘 사는 인생은 영접한 사람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영생이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우리에게 위기의 순간을 주고 있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닥치게 되는 위기는 우리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육신의 질병이나 재정적인 어려움 혹은 상호관계의 문제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을 가름하는 위기가 존재합니다. 그 위기는 바로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적 현재성을 가진 채 격렬하게 대두(擡頭)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 주님오실 때까지,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의 기로에서 주님을 선택하고 영생을 선택하라고 나지막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읊조릴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그것을 호도(糊塗)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사용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계속해서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만하면 됩니다. 그 음성듣기를 계속 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사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사람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나님이 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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