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교회개혁의 서문

골로새서 1장 21~24절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499년 전 1517년 10월 31일 독일 북부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라틴어로 된 대자보 하나가 붙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의 부정부패를 성토하며 신학적 논쟁의 불씨를 붙이려던 마르틴 루터의 95개 항목의 대자보였습니다. 일반 성도가 읽기 어려운 라틴어 대자보였지만 곧 독일어로 번역되어 방방곡곡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그를 파면하길 원했지만 쉽게 파면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속한 지역의 영주인 프리드리히 4세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루터는 1520년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첫 번째 책에서 만인사제권의 진리가 공표되고 교황만이 성서해석권을 가진다는 성벽을 넘어뜨렸습니다. 첫째 책이 발표된 지 두 달 후에 그는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는 책에서 성례전을 거침없이 공격하게 되며 성경은 오직 성찬과 세례의 두 가지 성례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세 번째 글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유(自由)하므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레오 10세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그를 파면하게 되었고 루터는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9개월 동안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은‘교회개혁’이란 말이 더 정확하다고 말할 정도로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주된 관심은 ‘교회’였습니다. 교회 변질의 시작은 ‘섬김과 봉사의 직분’이 ‘종교적인 권위주의’로 계급화 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주된 관심은 교황(인간)이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고 사람이 영광 받아야 할 대상일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행위로 얻어지는 공로의 결과라는 변질된 구원관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재확인 한 것이 종교개혁 즉 교회 개혁운동이 가져온 신학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교단의 권력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섬기는 종으로서의 모습이어야 할 성직자나 봉사자로서의 장로, 권사, 집사가 오히려 ‘힘’을 가지고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국가권력에 비호세력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의 자녀’가 아닌 ‘어둠의 자식들’처럼 살지는 않습니까? 교회안의 비리에는 함구하고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눈멀고 귀먹고 말 못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전통으로, 교회의 전통으로 바꾸어 지키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의를 구현하고 법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사랑의 법을 무시하고 세상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는 교회는 아닙니까? 교회에서 헌금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고 용서와 화해보다는 치리와 정죄가 더 용인되는 교회는 아닙니까? 돈 많으면 ‘장로’ 되고 없으면 교인되기도 부끄러운 교회는 아닌지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악한 행실에서 떠나 마음으로 원수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지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육체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복음을 기억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오백년 동안 우리는 교회 개혁의 전통에서 많이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짝하게 되는 순간부터 타락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경고를 받게 되고 듣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지게 되는 것을 성경을 통해 봅니다. 오늘 한국의 교회, 미주 한인 교회, 세계 교회가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교회가 뼈를 깎는 개혁-혁명적인 과정이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세계에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후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 가운데서 순교의 피를 흘리며 주님의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후 313년 공교회로서 인정받게 되면서 피를 흘리는 일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세속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동서로 교회가 양분되고 각종 비리와 부패가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되었을 때 루터를 기점으로 수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고 개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신대륙에서 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이루게 되었고 지난 수백 년 간 보이지 않는 힘으로서 세상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권력과 밀착되고 경제력과 합종연횡하면서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패한 권력을 비호하고 엉터리 대통령후보를 지지하는 이상한 모습이 지금 미국 보수 교회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사람이 중요한데 교회는 물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성도는 재정의 근원으로 인식되고 그 숫자는 재정적인 여유 혹은 사역의 확대/ 축소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신앙생활의 표준임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우리 삶에 기준은 소득수준이 아닙니까? 얼마나 십일조를 많이 하고 얼마나 감사헌금을 많이 내고, 작정헌금을 얼마나 했는지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정확하게 신약성경에서 이를 표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시 악한 행실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원수와 합하여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한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이 암울한 시기를 저는 하나님의 때가 도래한 시대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라고 봅니다. 지금 회개할 때고 교회가 변혁되어야 할 시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도 거룩하십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따라야 합니다. 이 시대를 살면서 거룩함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심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원수의 강력한 도전에 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을 기억합니다. 그의 신앙은 당시 사람들 가운데서 독보적인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국의 황제가 명한 것이지만 신앙인으로서 양심, 거룩함을 져버리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갈 위험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는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 명령을 어긴 벌로 들어갔지만 살아나왔습니다. 그의 신앙의 대상이요 절대자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굶주린 사자의 입에서 구하셨습니다. 제국의 황제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습니다. 다니엘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하게 살면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에 굳건하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흔드는 자의 궤계(詭計)는 때로 우리를 혼란(chaos)하게 합니다. 어느 길이 참 생명의 길인지 생사의 갈림길에서 우리를 죽음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늘 도와 주셔서 우리에게 복음을 듣고 순종할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은 바로 우리를 살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곤란함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애써 주님의 몸 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우리의 육체에 채워갈 수 있습니다.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질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게 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가게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과거처럼 계속 생명 없는 악한 행실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생명의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 것인가? 그 결과는 영원 속에서 극과 극이 될 것입니다. 전에 여러분과 저는 악한 행실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고 흠 없는 자로 인정해 주셔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사는 것은 다시금 주님을 인정하고 복음의 섭리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전의 그릇된 행실에서 벗어나십시오. 복음을 잊게 하는 모든 것에서 떠나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 사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해 남은 고난을 우리에게 채워가기를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에게 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Featured Posts
Recent Posts
Archive
Search By Tags
Follow Us
  • Facebook Basic Squar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