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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以信稱義)


갈라디아서 2장 15~21절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법은 무엇일까요? 동양에서는 한자 법(法) 자를 두 가지 어원으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해태(廌-법, 해태 혹은 해치)라는 상상의 동물에서 유래되었다는 해치설입니다. 이 짐승은 성품이 곧고 정직하며 충직하여 인간이 서로 다툼이 있을 때 부정한 사람을 뿔로 받아 밀고 나아가 물속에 빠뜨리게 한다고 합니다. 다음은 사슴이라는 동물에서 유래 되었다는 녹각설로 사슴이라는 짐승은 청정한 물만 마시고 탁하고 부패한 것은 멀리하는 본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뿔은 오직 정의를 점지하고 가늠한다는 설입니다. 이 두 가지 법에 대한 어원적인 뜻은 정의(正義)와 형평(衡平)이 법의 근본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법(法)이라는 한자어 자체의 의미는 ‘법여거수(法如去水)’라는 뜻으로 법은 물을 다스리는 치수와 같이 물이 흐르듯 순리와 상식에 따라 사회를 다스리는 질서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렇게 법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 ‘자연의 이치’를 사람이 살아가는 것에 적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법은 환경에 따라 만들어 가면서 자주 변하고 언어와 민족 그리고 문화에 따라 달리 운용(運用)됩니다. 온전한 법도 없고 그렇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법학자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법은 그 조문(條文)에 따라 표현된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법은 그 법전이나 조문 뒤에 숨어있는 정신을 따라 적용되어야 합니다. ‘법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이 법의 정신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인 법의 적용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법정신을 따지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613가지나 되는 율법(律法)의 조문들에 매여서 율법의 정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에 따라 사는 것과 은혜의 법에 따라 사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과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정신은 사랑이고 그에 따르는 순종이지만 이것이 조문에 따라 적용되어 현실에서 그 정신, 곧 율법의 정신이 희석되어 적용되어져 외식하는 율법주의자의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보다 율법이 우선되어서 사랑과 순종의 은혜를 저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율법주의로 인해 무시되고 그 근거가 결여되면서 법으로서의 효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법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야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그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것임이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실천하신 율법의 정신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후에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그 법이 유효합니다. 과거 율법의 조문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율법의 행위의 준수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왜냐면 작은 조문 하나라도 어기면 그 혹은 그녀는 불법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긴 것 자체가 불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다가 율법에 따라 죄인으로 드러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됩니까? 주께서 법을 어기고 죄를 짓게 만드는 장본인이 됩니까? 그럴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이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아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얻게 됩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인에게 열려진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가는 사람마다 의롭게 됨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이 아니고서 믿음으로 의인이 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시대가 예수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시작되고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자유자는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은 율법이 있기 전 아브라함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반드시 복을 주고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함이며 그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한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를 부르시며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 약속을 하셨고 아브라함은 오랜 기간 참아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 자손을 통해 만민이 복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으며 그 자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하나님의 유업을 이를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의 자녀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로서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 생각에 멈추지 말고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만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사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질문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법은 옳은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생각만해서는 그 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므로 우리의 마음 또한 바르게 될 것을 바라십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바른 삶을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십시다. 영어 표현으로 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질문을 항상 기억합시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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