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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열왕기상 18장 20-21, 36-40; 갈라디아서 1장 10절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신록(新綠)이 우거지고 가정을 생각하는 5월이 어느덧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여름이 더위를 몰고 오기 전에 봄의 기운을 맘껏 느끼라고 여름이 시작되는 입구에 비를 주셔서 봄을 맛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요 며칠 사이에 한낮의 기온이 많이 올라서 여름 같습니다만 밤엔 기온이 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이런 계절의 변화가 우리에게 신앙성숙의 영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변화는 언제나 두 가지 면을 생각하게 합니다. ‘설렘’으로 표현되는 기대와 두려움입니다. 빛과 그림자처럼 변화는 기대와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이 두 가지 심리적 원천은 그렇게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그것들이 크면 클수록 변화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두려움으로 선택을 하든지 기대감으로 하든지 순간순간 목적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화는 목적을 향해 가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정의가 가능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목적성이 없는 변화는 결국 멈추고 죽습니다.

변화는 변화를 낳습니다.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의 변화는 죽음으로 멈추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원한 변화-영생’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변화는 목적이 있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엘리야의 기도는 그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엘리야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는 것임을 오늘 백성들이 알도록 응답하소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소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응답해 달라는 그의 기도는 불로써 응답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기록할만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변화에는 엘리야의 기도내용처럼 하나님께로 우리의 심장이, 마음이, 영혼이 되돌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회개라는 선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부자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해 맘먹었던 그런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는 회개에 합당한 삶이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변화는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변환되어 새 피조물이 됩니다. 이것을 transformation이라고 합니다. 애벌레가 죽은 것 같은 변화 즉 번데기로 변화되는 과정을 통해 나비로 이전과 다른 존재로 변환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죽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스스로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우리는 단지 어떻게든 그 은혜에 응답한 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변화가 천천히 이루어진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고도 합니다. 불교용어를 빌려 쓰자면,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달은 복음의 진리로 변화가 일어나는 데 그것이 단번에 이루어져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냐 아니면 복음의 수용 후에 다시 태어난 심령이 구원의 완성에 있어서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우리의 신앙에 다 필요한 것입니다. 순간순간 자신이 죽어지는 경험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날마다 죽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날마다 다시 태어나는 변화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예를 들자면 그에게 돈오돈수의 경험은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에서 주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삶의 모든 근간이 흔들렸고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날마다 죽는 경험 즉 돈오점수를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게 되는 일이 그를 항상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였던 그는 날마다 다시 사는 경험을 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육체의 호흡이 끊어지더라도 새로운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 것을 믿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살아간 그리스도의 사도였습니다.

마땅히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하고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때때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내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바른 것 같아 보이는 시험을 겪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내가 가질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택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자연적인 것들을, 우리의 본성적인 것들을 영적인 것으로 변환시키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같이 살다가 나누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창세기 13장에서 그는 조카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양보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백부(伯父)인 아브라함이 먼저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관습에도 어긋나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양보와 희생으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에 따라 선택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영적인 성장이 더디게 혹은 멈추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으로 받은 바 그 비옥한 토지를 먼저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리라. 그가 머문 곳에서 그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며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행하는 법을 항상 배워야 합니다. 99세 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시며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고쳐주셨습니다. 부인 사래도 이름을 고쳐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는 사라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기 위해 대대로 지킬 할례의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은 새 법에 지배를 받으며 그 안에서 자라갑니다. 그 법은 사랑의 법이며 동시에 순종의 법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에게 변화의 순간이 왔을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에 따른 것으로 우리의 권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권리를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양(移讓)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져야 합니다. 그것은 한 번의 깨달음으로 시작되지만 지속적인 순종의 모습으로 훈련함이 요구됩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 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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