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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요한복음 10장 22-30절

22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지난 4월 13일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에 사람들이 다 놀랬고 또한 그 일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집권 여당이 국회에서 제2당으로 전락하고 새 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의 2당 체제에서 더불어 민주당, 새누리 당, 그리고 새롭게 창당한 국민의 당 등 3당 체제로 전환되어 복잡한 정치 구도가 되었다고 난리입니다. 국민들의 표심이 국회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기대했을 리 없는 여당의 수뇌부들은 사의를 표하고, 더불어 민주당은 총선에서 많은 국회의원을 배출했지만 최대 지지기반이었던 호남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에 휩싸여 있습니다. 국민의 당은 캐스팅 보드를 쥐고서 원내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로서 국민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그리고 국민을 위해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든 국회의원들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뽑아서 국회에 보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총선이후 국민들은 자신들이 뽑은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잘 살펴봐야 하는 책임이 크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도록 해야 합니다. 국민위에 군림하는 국회가 아닌 섬기고 봉사하는 이들인 것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이들은 바로 국민들입니다.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대변자로서 그리고 국민은 국회의 주인으로서 각각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잘 선택하여야겠죠?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때부터 우물쭈물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아세라와 바알 선지자 850명과 대적할 때에 백성들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18:21)” 여호수아는 가나안에서 그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오늘 섬길 자를 택하라!(수24:15)”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크고 두려운 날에는 항상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윤택하게 되고 배가 부를 때에는 하나님을 떠나고 잊었던 것이 그들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신들과 하나님 여호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이 모(38)씨는 아이가 태어나면 전원주택으로 옮기자고 아내와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이 흙을 밟으며 자라기 바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아이가 태어나니 이사 갈 지역을 고를 수 없었습니다. 각 지역마다 단점이 보여서입니다. 지방도시는 보육시설이 부족하고 신도시는 분주했습니다. 수많은 요소를 재고 따졌지만 어느 곳이 완벽한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사를 미뤘고 8년째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 2013년 5월 17일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7905.html)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택을 할 때 많이 망설이게 됩니다. 하지만 보통은 자신의 경험 혹은 지식, 직관력이나 통찰에 의해 선택하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의 조언을 듣고 합리적으로 생각이 들면 택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태도에 따라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선택의 기로에서 어쩔 줄 몰라 하게 되고 떨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결정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가진 가치관, 세계관, 태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자신에 대한 ‘처절한’ 완벽주의에 기인한 것입니다. 무엇을 찾아 결정하려고 할 때 잊은 것은 없는지 빼먹거나 더 좋은 것이 나중에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기대에 결정의 순간을 늦추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결정 후의 일에 관심하십시오. 잠언은 이런 일에 대해서 말씀을 남겼습니다. “물건을 살 때는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돌아와서는 그 물건을 자랑하는 것이 사람이다.”(잠언 20:14, 현대어 성경)

1999년 고고학 발굴을 위해 이스라엘로 간적이 있습니다. 여러 번 이야기해서 여러분이 좀 식상하실 수도 있지만, 그 때 들었던 강의 가운데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성경과 좀 다른 실제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대해 들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들은 우리가 아는 바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 살았던 사람들의 가옥에서 작은 우상들 곧 나무 혹은 진흙으로 구워 만든 아세라 여신의 우상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곳곳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지만 각 지방마다 여전히 제단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제사 드린 흔적들이 남았는데 거기에는 다른 신들에게도 제사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과 이방 신들을 겸하여 섬겼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탄하며 부르짖었던 내용과 같지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우물쭈물하는 순간이 많았던 이유는 조상들이 만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모세를 택하시고, 다윗을 택하시고, 제사장과 선지자를 택하셔서 그들에게 보내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다른 모든 민족과는 달리 생각하시고 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고 아무 형상도 없으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의 모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위엄과 형상에 주눅이 들어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조각의 심미에 빠져 황홀경(怳惚境)에 멍하니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화려하게 치장할 수도 없고 위엄도 없어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었기에 곧잘 이방신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게다가 말라기 이후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때까지 사 백년 동안 하나님에게서 아무런 메시지가 있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상이나 꿈이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욱더 하나님을 믿지 못할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의 시대에서도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전 164년 마카비 일가는 폭정을 일삼은 총독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를 내몰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탈환하여 다시 정하게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을 할 수 있을 때까지의 일입니다. 당시 등대에는 하루치 기름 밖에 없었지만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하면서 새로운 기름을 준비하는 8일 동안 꺼지지 않았답니다. 그 일을 기념하려고 유다 마카비는 그 날들을 축제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 절기가 바로 하누카입니다.

그 일은 약 200년 후에도 기념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그동안 화제가 되었던 예수에 대하여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짜고짜 예수님의 메시아 곧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한 일로 인해 나를 믿으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말대로 그가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을 터이니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메시아임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예수께서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에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나사렛에서 나온 사람이 하나님의 메시아가 될 수 있을까?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 세리, 열심당원, 누구인지 인지도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은 그 랍비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였습니다.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말씀만 하시는구나. 어느 누가 그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단 말인가?” (요 6:60, 현대어 성경) 예수님은 이미 이런 사람들과 한번 이상 충돌을 하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내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대놓고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들으려고 하고 원하는 것만 하려고 하는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

그 사람들은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은 자기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예수님의 일들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일들을 보면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단호박’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but you do not believe because you are not my sheep.” 이 말씀은 “나는 너희를 택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택하는 일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케케묵은 예정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정론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인 나를 택해주시고, 은총으로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의 일부가 예정에 의한 구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믿고 있습니다. 맞지요? 아니라면 말씀하십시오. 그런 분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이전에 몰라서 주님을 훼방하고 지었던 죄를 고백하시고 용서받으시고 구원의 길에 함께 가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에게 소망은 이것입니다. 그분의 손에 있는 양은 절대 빼앗기지도 않고 멸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시기에 그 손에서 누구도 강제로 빼앗을 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시고 자신의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입니다. 그 안의 성품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예가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들에 대하여 성취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이 되셨습니다. 말씀에 따라 사셨고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를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구원자로 믿으며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대속자로 믿습니다. 아멘.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하나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예가 되시고 순종하셨듯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그 말씀에 따라 예가 되고 아멘이 되고 순종하는 이어야 합니다.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부활로서 다시 살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도 그와 같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이유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생명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가 하나이듯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우리도 당하는 것,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충만한데서 자라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고 우리를 불러주신 것을 기억하고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 되길 원합니다.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넘치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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