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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위대한 복음의 교훈; 겸손


빌립보서 2장 5절~11절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설교자 혹은 목회자가 자신이나 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대하여 종종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라도 자신이나 가족을 보호하려는 인간심리의 기본적인 방어기제이기에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설교자의 입장에서 명확하지 않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는 때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유익함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대한민국의 가치관이 지금과는 좀 다른 세계에 있었습니다. 개인주의가 판치는 요즘과는 달리 아직은 단체나 집단이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요. 그래서 나보다는 가정이, 가정보다는 사회 혹은 국가가 준거(準據)집단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차츰 무너져 가고 있을 때 양극에 선 사람들은 이념 때문에 충돌하였고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라 대립하였습니다. 사실 이 둘은 상립(相立)하면 좋은 것이지만 대립(對立)하면 질서가 문란해지고 공동체 가치관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시절에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 중에서 고3때 만난 담임선생님은 좋은 영향력을 끼쳐주셨습니다. 종종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일이 있지만 가장 민감하고 힘든 시기에 삶의 기준이 될 만한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도록 남은 것이 있다면 우리 반의 급훈입니다. “나보다 남을”이라는 급훈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그 급훈은 제 머릿속에 잘 박힌 못처럼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준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삶의 기준이 될 만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것이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아멘.


본문의 말씀은 사실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연합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의 근본이 되는 자세는 다름 아니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는 구절입니다. 스스로 겸비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된 위대한 복음의 교훈으로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겸손이 필요함을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에 필요한 태도

오늘 본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2장 1절부터 4절까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권면’은 서로 하나님 말씀을 근거하여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모든 ‘사랑의 위로’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연약한 지체를 위로하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교제는 원문에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니 이 둘은 사실 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심성과 영혼이며 다른 하나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상호간의 조화나 영적인 교제를 의미하기도 하고 성령의 주재하심에 따라 행하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印)치심에 따라 교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없고 주라고 영접할 수 없음을 아십시오. 긍휼은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동정이나 애정을 말하고 자비는 긍휼에서 비롯된 부가적 표현으로 둘 다 사랑에서 나오는 말로 연약한 자나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덕목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덕목들을 행할 때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으로 뜻을 합하여 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하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자기 일과 다른 사람의 일을 서로 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바울에게 기쁨의 소식이 될 것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의 원리는 이렇습니다. 곧 빌립보 교인들이 덕목을 가지고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과 함께 굳건하게 서게 되고 전파되며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그 일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도 되고 그리스도 앞에서 자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델이 되시는 그리스도

이 일에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신 분이 있다고 바울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 모범을 따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르는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설교자로서 본문보다 더 간략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되신 것을 나타낼 자신이 없습니다. 단순히 이 구절들을 반복하고 더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점점 더 길어지고 자신 없어집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살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없이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고 무능해지고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지닌 죄인이라는 의식이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영광이 주어졌기에 여러분과 나누어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지만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이십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던 빌립에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대답하시던 예수님은 이제 예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면 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종의 형체는 바로 인간의 육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피조물에 창조주가 담아질 수 있을까요? 창조주의 영원한 힘과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 피조물인 인간의 몸에 담겨질 수 있을까요?

어느 조각가나 미술가에게 자신이 만든 조각품이나 그림 속에 갇혀 지내라고 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혹은 그녀는 제정신에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시지요. 친히 자신의 자리를 낮추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기로 작정하시고 계획을 세우시고 처녀 마리아의 자궁에 작은 세포부터 시작해서 태아가 되시고 9개월 모태에서 육체를 입으신 채로 자라 탄생하셨습니다. 어느 인간처럼 자라나 서른 살 즈음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세른 세 살 반, 인간의 인생으로는 참으로 짧은 생을 사시고 하나님 우편에 오르시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으로 보인 예수님의 인생은 무척이나 짧고 더욱이 알려진 주님의 삶은 전체 삶의 약 십분의 일만 드러났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 영향력을 끼쳤고 끼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끼치게 될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을 그토록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을까요? 바울은 오늘 그것을 주님의 낮아지심, 겸손, 비워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낮아지심. 그래서 인간이 당하는 최악의 형벌로서 십자가를 지시고 거기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되는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의 겸비함과 낮아지심을 통한 복종을 통해서 지극히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highest name) 이름을 주셔서 모든 피조물로서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살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시인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원동력은 물로 사랑입니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오시게 하였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위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주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

우리에게는 두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모범을 따라 살 소망입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의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이루게 하실 성령의 능력으로 이 일이 우리에게 가능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룩한 성령으로 모범되진 주님을 따라 살 소망이 우리에게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살았던 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를 본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도전을 받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자리 곧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서 몸소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 소망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11절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우리로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우리가 이미 전에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죽었던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은 멸망을 받지 않고 다시 살리심을 입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다시 살 소망이 있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죄에 죽었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다시 살 소망을 가진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우리가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 소망이니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겸손의 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약하고 없는 것이 많으나, 부족함이 채워져 풍성하게 되고, 연약함을 돌보아주셔서 강하신 하나님을 드러내며, 없어도 있는 자 같이 변화시켜주실 하나님의 충만하신 성령이 가능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은 하실 수 있기에 우리는 담대히 나갈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닮아가는 길에서 우리가 행할 길을 한 걸음씩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 앞에서 겸비하여 항상 주님의 말씀에 청종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멘.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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