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하나님의 의가 되라
고린도후서 5장16-21절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15장 1-3, 11b~32절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1b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얻었습니다. 이 직분은 하나님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목을 이루게 하신 것을 통해 부여받은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화목하게 하는 말씀 곧 복음을 부탁하셔서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일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입을 사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어 세상의 사람들에게 파송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파송을 받아 복음 곧 하나님과 세상이 화목하게 할 말씀을 전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전에 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던 죄인이었고 멸망 받을 자의 종이었으며 마땅히 영원한 벌에 처해져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전하는 주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은혜의 말씀으로 자라게 하시고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훈련을 받고 제자가 되어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이 살아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여러분의 신분고하와 남녀노소와 처한 환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에게요? 우리와 같았던 사람들에게 입니다. 그들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고 그들은 아직 우리의 원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나는 그들을 위해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과 기록된 토라(Torah) 곧 율법의 말씀을 중심으로 조상 대대로 지켜 내려오던 것들을 율법의 조항으로 만들어 이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여겨 멸시하였습니다. 그들은 613가지나 되는 조항을 만들어서 금지조항과 의무조항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 비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을 죄인으로 여기고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였고 갈릴리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자리하는 것조차 싫어하였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말씀을 나누시는 동안에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으려 ‘죄인’들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어디든 그들은 항상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만류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비방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비유로 말씀 하셔서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잃어버렸던 ‘동전’이었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양’이었으며 멀리 떠났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다시 찾은 그 주인공들은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들을 찾은 기쁨은 잔치함으로 그리고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 비유의 말씀 가운데 오늘 우리는 돌아온 탕자라고 부르는 두 아들에 대한 비유를 택하여 함께 말씀을 읽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동안에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실 때에 세 가지 축으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둘째아들, 아버지 그리고 맏아들. 이 세 가지 축으로 말씀을 보시고 묵상하면서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세 축을 통해 발견한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불효하고 못된 둘째 아들.
사람에게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참 끝이 없습니다. 부모의 재산을 얻으려고 멀쩡한 부모를 치매진단을 받게 하고 요양원으로 보내 재산을 가로채는 자식을 그 부모가 고소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식은 그로인해 구속되고 부모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보았습니다.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어느 날 자기 아버지에게 물려줄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죽지 않았는데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사람은 미련하고 못된 사람이라고 인정되어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돌에 맞아 죽는 형벌에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가 미련한 사람이라고 하는 까닭은 우선 당시 법에 둘째가 아버지의 유산을 얻을 수 있는 때는 돌아가신 후에는 삼분의 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망이전에 요구하여 받게 될 때에는 10분의 1만 얻었습니다. 얼마가 지나든지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는데 둘째는 그런 기회를 져버렸습니다. 또한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남겨줄 것을 요구함으로 불효하는 자가 되어 죄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급하게 재산을 모아 가지고 떠나게 된 것은 그 생명을 보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네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둘째는 자신이 모아가진 재산으로 멋지게 살면서 재산을 증식하려고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자신 있게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뭔가 계획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는 방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귀한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욕심에 치우쳐 향락에 빠졌고 결국 재산을 남김없이 탕진하게 되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는 이제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게 되었을 때에 아무도 그를 돌봐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보통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타인에게 그 결과의 원인을 돌려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미워하게 됩니다. 둘째 아들도 그 아버지와 그 동무들과 그 처지를 원망하고 미움으로 마음을 채웠다면 돌이키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기억하며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겸비해지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회개하는 자리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회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전달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를 한 없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 두 번째 말씀을 축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
자식의 사랑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마도 어머니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도 어머니 사랑에 못지않습니다. 자신이 죽지도 않았는데 재산을 떼어 달라는 자식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빨리 죽으라는 둘째의 속내가 다 보이는 데 그에게 어떻게 사랑을 보일까요? 아버지는 그 아들의 바라는 것과 마음의 원하는 것을 수용하고 어떤 자세를 가졌을까요?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 아들은 분깃을 나눠 받게 되었을 때에 사람들의 손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사람들을 막아서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그 일을 숨겼을 것입니다. 정녕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아들을 눈앞에서 잃어버린바 되고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떠나는 둘째를 보면서 아버지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요?
동네에 유력한 아버지는 흉흉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둘째가 간 동네에 큰 흉년이 들고 아들의 소식이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땠을까요? 매일 기도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을까요? 이후로 아버지는 마을로 이어지는 길가에서 그 아들이 혹여 돌아올까 싶어 매일 마을 어귀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못된 아들 불효자인 둘째가 돌아올 때에 마을 주민이 공분하여 그를 해할까 싶어서 자리를 떠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동안에 이미 우리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둘째가 마음을 고쳐먹고 회개하는 마음을 품으며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마을 근처에 이르렀을 때. 아직도 거리가 멀었지만 나이 많은 아버지, 그를 사랑하는 아버지는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그를 반깁니다. 그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때에 아버지는 종들을 불러 잔치를 명하고 그에게 가락지를 끼워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신발을 갈아 신게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하시고 기쁨으로 잔치를 준비하였습니다.
분노하는 맏아들.
아버지의 일을 맡아 열심히 아버지의 집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던 맏아들은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집에서 풍악을 울리며 잔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종에게 물어보니 둘째 곧 그의 동생이 돌아왔기로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고 사람들을 불러 잔치하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맏아들. 아버지의 모든 일을 다 맡아 준행하고 섬겨 원하시는 것을 행하였던 맏아들은 마음에 분이 났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노를 발하고 그 집에 들어가기를 싫어하였습니다.
맏아들은 둘째가 자신의 유산을 다 챙겨 갔을 때에 나머지 곧 아버지의 나머지 재산이 자신의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재산을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증식하고 부하게 되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업으로 이어질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둘째와 같이 나누어 달라고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고 그 아버지의 마음에 흡족하게 하여 열심히 분부한 것을 섬겨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충성스럽게 아버지를 섬기고 효를 다하고 그것을 지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못난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들어와 잔치 하는 것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아버지의 권하는 말을 듣지 않고 아버지에게 쏘아붙였습니다. 어찌 보면 그가 한 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상한 마음 때문에 지금 현실을 직시하고 있지 못한 상태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는 친구들과 잔치하기 위해 염소새끼도 주지 않으셨으면서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한 그가 돌아왔는데 그를 위해 잔치하는 것이 옳습니까? 맏아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그것은 아버지를 섬기는 아들로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맏아들의 의무를 져버리고 겉으로 해야 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맏아들은 마땅히 자신의 동생을 반겼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은 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편애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각각 그대로 사랑하는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공평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동생은 벗과 비교할 수 없는 가족이기 때문에 그가 한 주장은 정당한 것이 못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들아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네 동생 우리 가족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니?”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어떤 자식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둘째 입니까? 맏이입니까? 대부분 먼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맏아들의 자리에 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들은 누구입니까?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양심을 속이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 아버지께 참으로 겸비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목욕탕은 깨끗한 자를 위하지 않고 더러운 자를 위합니다. 교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합니까? 죄 있고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 마음이 아프고 슬픈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곳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 곳에 먼저 부름을 받아서 주님께서 보장하시는 풍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만 아니라 우리에게 돌아오는 죄인, 우리의 둘째 동생, 셋째 동생, 우리의 잃어버린 가족들에게 그렇게 하십시오. 그들이 우리에게 돌아와 가족이 될 때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우리의 가족이기에 아버지의 사랑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마땅히 자녀로서 후에 태어날 이들을 맞이하고 격려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가 가진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 그리스도께서 화목하게 하신 것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나아오는 이들에게 화목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섬기는 데에서 나옵니다. 우리 뉴욕성화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평강주시기를 바라며 이 일에 우리가 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찬송하며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