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중의 두 아이
누가복음 1장 39~45절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Luke 1:39-45
39At that time Mary got ready and hurried to a town in the hill country of Judea, 40where she entered Zechariah's home and greeted Elizabeth. 41When Elizabeth heard Mary's greeting, the baby leaped in her womb, and Elizabeth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42In a loud voice she exclaimed: “Blessed are you among women, and blessed is the child you will bear! 43But why am I so favored, that the mother of my Lord should come to me? 44As soon as the sound of your greeting reached my ears, the baby in my womb leaped for joy. 45Blessed is she who has believed that what the Lord has said to her will be accomplished!”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러한 인사가 지금 가장 어울리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Happy holidays!”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1970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정치적으로 옳은 표현이라는 명분아래 대중 매체와 기업들 사이에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Merry Christmas가 유대교나 이슬람교 같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피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Happy holiday가 아니고 Happy holidays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단수로 표현되면 특정한 날을 지칭하기 때문에 연말에 여러 종교의 명절을 전부 묶어서 복수로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법정 공휴일은 어디까지나 크리스마스이고 전통적으로 이를 존중하여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키고 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불쾌감을 표시한다는 것은 “미국의 정신”에 맞지도 않고, 기존의 문화유산을 자신의 종교와 다르다고 배척하는 행동은 결코 자유시민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 이스라엘에서 ‘Hanukkah’가 불쾌하다거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라마단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하면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문화의 척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불쾌하기만 합니다. 어쨌든지 여러분은 복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크리스마스가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은 대강절 네 번째 주일, 성탄절이 있는 주간의 시작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력에 따라 읽는 말씀가운데서 택한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왜 이 말씀이 이 시점에서 읽혀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복중에 두 아이의 만남이 산모들의 놀라움과 기쁨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인 사가랴에게 나타난 천사는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가지게 될 것임을 알려주면서 그는 복중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정말 요한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남달랐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의 전해준 소식을 듣고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에 복중 아기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산모인 어머니 엘리사벳에게 성령에 충만함을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가운데 중복되고 의미 있는 단어가 몇몇 눈에 들어옵니다. 문안, 복중, 성령, 기쁨.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려고 먼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유대지파에 속한 산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 살던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임신이 이미 6개월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놀라움으로 곧 산골로 향했습니다. 사가랴의 집에서 칩거하고 있던 엘리사벳이 격하게 인사하는 마리아의 포옹에 기뻐하였습니다.
원문에 나온 문안(ησπασατο 에스파사토)이라는 단어는 ‘껴안다’는 뜻이 담긴 말로 포옹과 인사를 포함하는 열렬한 인사에 사용합니다. 아마도 엘리사벳은 여러 이유 때문에 임신한 것을 한 이후로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녀가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부끄러움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마리아가 방문하고 문안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깨닫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해불가한 일을 만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믿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제사장 가문에 자식이 없는 것은 천형 즉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고 버림받은 표시라고 여겨지는 사회문화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그녀의 심적인 고통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을 통해 이스라엘은 침묵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사백년 동안 잠잠했던 하나님의 음성은 아버지 사가랴를 통해서 들려지기 시작했고 아들 요한에게서 선포되었습니다. 그의 사역은 태중 있을 때부터였기에 예수님은 그를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I tell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is no one greater than John.”
하지만 그녀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놀라운 섭리로서 이스라엘의 빛을 보게 하는 은혜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마리아를 만났을 때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녀에게 충만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닥치는 이유 없는 어려움이나 공격에 대하여 우리가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충만함에 있습니다. 이것은 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주님을 바라고 자신을 경건한 삶으로 훈련시키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훈련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도하며 영적인 훈련을 지속해야 합니다. 중단하지 말고 주의 도움을 받으며 나아가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총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시대와 민족을 대표하게 되거나 하나님의 일에 중요하게 사용될 인물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처럼 평범한 생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은총보다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은총이 더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은총은 모두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각 사람에게 특별하게 그러면서도 일상적인 은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은 모든 이에게 주시는 은혜는 모든 사람이 특별한 존재로서 특별하며 동시에 일상에서 주시는 것이기에 발견하는 자마다 특별해지기 때문입니다. 잘 설명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만 여러분이 이해하셨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일상에서 주시는 것이기에 특별하고 그 은총은 우리를 보다 나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군사로 주님 앞에 서게 합니다.
이런 일들이 그들의 복중에 시작되었습니다. 6개월 된 태아가 뱃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태아들은 그 시기가 되면 활발하게 움직이며 엄마 배를 차거나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특별한 체험으로 경험하게 되고 깊은 애정과 기쁨을 표하게 됩니다. 복중에 있던 요한이 그 행동을 한 것이 마침 마리아의 문안에 때를 맞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전과 다른 어떤 기쁨의 몸짓이었다는 것을 엘리사벳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고백은 성령을 통해 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충성스런 복종(불가항력적인 수용)을 하는 마리아를 칭찬하고 복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미가 있기 전까지 거기 함께 머물러 있었습니다. 석 달쯤 함께 머물며 심신의 안정을 취하며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요셉과의 정혼을 확정하고 신혼여행의 표식을 취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해석입니다만 결혼 전에 임신하게 되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요셉의 배려와 이를 섭리하시고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말씀하심 곧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 신실하심이 때가 이르러 그들에게 나타나게 되었을 때 놀랍게 준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태어남도 주님께 돌아감도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매 순간 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역사하시는 주님은 그렇게 우리의 삶을 매번 특별하게 만드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네 번째 주일, 사랑의 촛불을 켜고 주님의 사랑을 복중 아기들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연말에 모두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인사하고 기쁨을 나누는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게 주신 성탄 선물과 같은 것일 것입니다. 이를 즐거워하며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이 한 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복중의 아기들처럼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들에게 영향 받은 어머니, 가족, 친지들이 함께 기쁨을 나누며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영향력을 끼치는 주님의 백성들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