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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나사렛 예수가 가진 의미


마가복음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성경에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이름보다는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 더 유명해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별명이든 바뀐 이름이든 그 사람을 연상시키는 말이 됩니다. 그 이름은 나름대로 의미가 담겨져 있기에 대상을 취급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행동이 느리거나 말이 느린 사람을 ‘느림보’ 혹은 ‘거북이’라고 부른다면 그 혹은 그녀는 뭔가 느리게 행동하는 이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스스로가 부인하지 않은 경우 그 다른 이름은 그 혹은 그녀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을 나타냅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자의건 타의건 간에 다른 이름을 지어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포함되어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예능방송에서는 이런 이름 짓기가 유행처럼 번져있습니다. 좋든 싫든 그 이름으로 알려져서 유행이 되고 재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사용되고 있고 해당 연예인과 프로그램 그리고 방송사나 협찬사에 경제적인 유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과열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사회적으로 볼 때 건강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는데 대부분 ‘이름 짓기’는 대상에 대하여 수치심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진 이들은 이름에 대해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명예의 상징인 이름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이 불러주는 것이 이름이라면 그 이름은 귀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이름의 대상은 귀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무명의 사람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 무명의 영웅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였고 그 자취를 이웃에게 남겼으며 그 이야기가 전해질 때마다 그 이름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간 무명의 인사들이 세계와 사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다는 것에 깊이 감사하면서 이런 이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을 통해서 역사를 운행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복음으로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리고로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소문이 온 동네에 쫘~악 퍼졌습니다. 거기 채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구걸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 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곧 오신다는 소리에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예수를 부른 그 사람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간절히 주님을 찾았고 주님은 그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를 불러서 원하는 대로 눈을 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산 증인이 된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는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되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고 또한 그런 사람을 만나고 길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가 믿는 믿음에 만족하고 전도하거나 선교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죽음으로서 빛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게 되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영적인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먼저 받아 가진 빛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전도고 복음을 맡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주 예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이유는 우릴 통해 복음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먼저 부르심을 입은 까닭은 단지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이지 다른 이들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먼저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역할을 감당하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바디매오는 그 일로 부르심을 입었고 그 역할을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가 가진 체험은 그를 주님께로 붙들려 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구하십시오. 그리고 만사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선 믿음으로 만사가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을 보십시오. 그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세상을 보시면 아시게 될 것 입니다. 이론이나 이성적으로 이것을 증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단지 믿음을 가지고 보면 달리 보이고 달리 보이면 달리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기에 그가 그토록 간절히 예수를 불렀을까요? 그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나사렛에서 오신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은 천하고 경멸받는 곳을 의미하였으며 가난하고 빈약한 출신이라는 오명(汚名)을 가지게 할 정도로 무시 받는 촌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위대한 빛이 세상에 비취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무시당하는 사람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희망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비방거리의 이름이 동경과 희망의 이름으로 변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사실 좋은 의미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귀하고 높으신 이의 이름에 걸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윗의 혈통을 가진고 나신 분이셨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르침에나 삶에서 본이 되시는 분이었습니다. 왕궁에서 태어나 온갖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할 분이셨지만 그렇지 않고 낮고 낮은 자리에서 나시고 자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을 업신여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분의 능력과 나타난 이적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이끄는 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이름은 항상 주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께서는 온전히 비천하고 가난하고 무시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셨고 친구삼아 주셨으며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포하시길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저들은 천국의 주인들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때문에 무시당하고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고 상을 받게 되고 저들이 천국을 소유한 이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성경을 어떻게 들었는지 혹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바가 유별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출신으로 유다지파가 아닌 스불론 지파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의 땅으로 여겨 불신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정확하게 예수님의 출신을 유다지파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다윗의 위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에 의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자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하신 일과 가르침에 대해 소문을 들었고 그 내용에 비추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 지식은 예수에 대한 믿음에 이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메시아 대망에 대한 믿음이었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눈으로 그를 보기를 원하는 그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메시아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온 세상의 구주로 믿습니까? 아니라면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다고 멸시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마음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으며 누구든지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 일에 주님은 우리를 여기에 부르셨고 이 시대에 나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믿음의 고백이 주님 앞에서 한 것임을 기억하시고 말씀과 기로로 거룩한 삶을 살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우선을 두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복이며 은혜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며 말씀을 맺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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