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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없는 양

마가복음 6:30~34, 53~56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53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째로 메고 나아오니 56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제가 어렸을 때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른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저는 집을 자주 나가는 ‘도망-쟁이’였다고 합니다. 일찍 걷고 뛰어 다닌 탓에 여기 저기 호기심 많은 어린 나이, 두 세 살 된 덩치 큰 아이가 뒤뚱거리며 동네를 따라 내려가 학교 운동장에서 뭔가에 홀린 듯 놀고 있었는데 동네 형들이 알아보고 지키고 있더랍니다. 새끼줄로 묶어도 보고 기저귀로 동여매어도 봤지만 허사였다고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어르신들은 저를 모두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셨다고 했었습니다. 동네 형이 찾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여기 저기 방황하면서 지금 보다 더 고생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모태에서부터 지금 여기까지 주님의 돌보심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전에 예수님을 떠나 있었어도 주님은 저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이러한 은혜가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도 넘치시길 빕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사도들이 예수님의 명을 받아서 둘씩 짝을 지어 전도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각각 흩어져 회개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낫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고하는 데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곤고함을 보시고 한적한 곳에서 쉬기를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달려가기 시작해서 배보다 앞서 다른 고을로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을 보신 예수님은 그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집을 떠나고 먼 곳까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시간시간이 고되었습니다. 이젠가 저젠가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줄 메시야를 언제 보내주실까?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룩해줄 메시아는 어디계신가? 이런 마음조차 잊게 만드는 시간이 흘러 주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귀한 목자였습니다. 그것도 선한 목자.


양은 일반적으로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고요? 들판에서 양들은 먹이사슬의 아랫부분을 차지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리, 곰, 사자 등의 육식동물들이 양떼를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이런 맹수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 푸른 초장으로 맑은 물가로 인도해줍니다. 만일 목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양들을 돌볼 수가 없게 된다면 아니 목자가 없는 양들이 있다면 큰 위험에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목자 없는 양이란 위험천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거짓 목자에게 속아 흩어진 양으로서 피폐한 영적인 상황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목자 없는 양’이라는 표현은 민수기 27장 17절에 처음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신 후에 사랑하는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였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택해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여호수아(Joshua)는 적들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보호하여 주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福地)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무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에게 목자 같은 이가 없었습니까? 제사장이나 서기관 혹은 바리새인들은 마땅히 종교지도자로서 무리들에게 목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리를 추구하고 자신과 가문의 명예만을 생각한 이들은 진리를 저버리고 거짓 목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정치적 영향력을 고수하려고 무리들의 안위와 평안을 져버렸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 존재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살려고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처지를 아셨고 자신의 몸이 피곤하였음에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불쌍하게 여기시고 진리로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배고픔이었습니다. 참 안식도 없이 살았던 무리들에게 안식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셨습니다. 무리들은 지쳤고 목말랐으며 배고파했습니다. 단지 육신의 것만 이었을까요?


매드 맥스(Mad Max: Fury Road, 2015)라는 영화가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어린 시절에 봤던 것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멜 깁슨이 나왔던 그 영화는 리메이크 되어 올해 개봉되었는데, 목사라서 그런지 몰라도 제가 보기에 이 영화의 주제는 ‘구원 salvation’ 이었습니다. 핵전쟁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찾아야 할 곳 초록의 대지, 낙원, 구원의 땅. 하지만 황무지를 헤매고 거기 있다고 믿던 것이 사라진 때에 ‘Where must we go?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를 질문합니다. 구원의 소망이 어디 있냐고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구원을 향한 갈망을 하고 있는 영혼들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압제 하에서 오랜 동안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았고 하늘 아버지의 귀에 울렸습니다. 때가 이르러 유대 땅에 오신 예수님은 압제받는 이스라엘, 죄로 신음하는 인류를 위해 자신을 드려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 제국의 힘 아래, 경제논리라는 우상아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아래 사람들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비록 육신은 윤택하고, 삶은 나아진 것 같고, 남성과 여성, 노인과 어린이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여기는 일들을 하지만 정말 그런지, 그것이 진정 진리에 맞는 일인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평안하지도 풍성하지도 그렇다고 자유롭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What should the Church do?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에게 뭐라고 하실까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환난의 때요 인내의 때입니다. 주님의 역사를 기다립니다. 동시에 우리의 소망이 이룰 줄 믿고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주의 강하심이 드러나기를 바라며,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 주의 풍요하심이 나타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잘못 행하고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음성을 듣고 나아가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로 죄를 알게 하고 죄에 대한 형벌이 있음을 알려주지만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거나 구원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 우리에게 의로 덧입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세상이 원하는 길로 가야 합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까? 무엇이 그것을 알려줍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뭐라고 하십니까? 자비와 긍휼의 사랑의 법을 따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십시오. 그들의 진리를 향한 갈급함을 예수의 이름으로 채워주십시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거기 그 자리에 있어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주님의 사랑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십시오. 교회는 거기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거기 그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거기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님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담담히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면 거기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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