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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삼하 6:1~5, 12~19

1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12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육체의 한계를 넘어 영생을 선물로 받고, 무엇보다 죄로 죽을 인생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 같이 되는 구원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불리고 거룩한 무리라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사람들은 우리를 크리스천이라고 불러주었고 우리는 그 이름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십년, 이십년, 삼십년.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주 앞에 서는 날까지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모든 믿는 사람들의 꿈이며 소망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을 떠나 살수 없기에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찬양과 감사 그리고 주의 말씀을 홀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의 소망과 결심과는 잘 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기를 바라지만 여전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썩어질 것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제 몫 챙기기 바쁜 목회자, 사역자, 성도라고 이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서약하고 살지만 세상 권력에 충성하고, 세상 명예를 따라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새삼스럽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새김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 주변에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행하는 작태(作態)가 가관(可觀)입니다. 자신의 정욕대로, 바라는 소원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굳이 하나님의 성호를 거들먹거리며 살 필요는 없습니다. 수많은 종교와 그 현상들이 그런 것들을 조장하고 이용하고 추구하고 있으니 거기 가시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신앙연륜 자랑 말고 신앙생활 잘하자! 뭐 이런 거 입니까? 저는 말씀을 대하면서 오늘 이것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나? 어떻게 주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 교회가 물질적으로 풍성해지고, 힘이 있게 되고, 보여 지는 것이 많아질 때 교회가 썩은 냄새가 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통해 얻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였습니다. 옳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탄생한 이후에 오랜 시간을 지내 오면서 교회가 타락하고 못된 것을 배웠을까요? 아닙니다. 인간 안에 내재된 죄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타락시키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교회 안에서 분파를 만들고 외적인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형식주의를 경계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이미 교회 안에서의 분열을 보여주었고 이는 역사 안에서 교회의 분열을 적절하게 보여준 예(例)가 되었습니다. 교회 타락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 외에 세상을 섬기고 본받은 인간 죄성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역사를 어떻게 끊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을 따라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데 오랫동안 법궤를 모셨던 아비나답의 가정에 화(禍)가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산지에 살던 레위사람 아비나답은 하나님의 궤를 이십년간 보살피고 인근에 평안을 끼치는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그는 자녀에게 법궤에 대한 교육-신앙교육을 등한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가르침인 율법대로 법궤를 옮기지 않았고 법궤를 만질 수 없음에도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들 가운데 하나인 웃사가 하나님의 치심으로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에 따라 옮기고 관리되어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본래의 질문을 되새겨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 것이 좋을까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방법은 레위 사람 중 고핫 자손이 어깨에 궤를 메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짐승에 태우거나 수레로 옮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법궤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삼십세부터 오십세 사이의 고핫 자손만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대대로 행하여야 하는 일로 정하셨습니다. 다른 성막의 기물들은 다 소를 이용하여 수레에 싣고 옮겼지만 고핫 자손들은 손수 성소의 기구들을 어깨에 메어야만 했습니다. 아론 자손들의 제사장들이 성소의 기구들을 옮길 준비 즉 포장을 하여 두면 고핫자손들은 그것들을 채에 끼워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가장 거룩한 성물을 지게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을 예표(豫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 방법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듯이 우리의 구원의 방법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대었던 웃사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귀하게 여기고 잘 보존하였습니다. 유명인이 내 친구라면 그를 자랑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궤에 대한 자신의 친밀감을 자랑삼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친밀함이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으로 주신 말씀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했습니다. 웃사는 자신의 섬김과 친밀함에 대하여 과신과 경솔 그리고 교만을 통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에는 분명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보이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를 치셨으므로 그가 궤 곁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자리에 이십년을 지켰던 법궤를 왕이 된 다윗의 장막에 옮기려고 하였을 때 다윗도 법궤를 이동하는 것에 대한 율법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새 수레를 준비하고 소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려고 했던 것은 그의 율법에 대한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죽자 기겁을 했고 자리를 피하고 궤를 멀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아차’ 싶었고 근처에 사는 레위 지파 고핫 자손 가운데 하나인 오벧에돔의 집에 궤를 옮겨놓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복을 주셨습니다. 대체 무엇이 달랐을까요? 단지 그의 집엔 하나님의 궤가 석 달 밖에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법궤는 성소와 지성소를 막는 천으로 덮고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다음 순청색 보자기로 덮은 다음에 궤에 있는 채에 꿰어 어깨에 메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즉 궤만 달랑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벧에돔의 집에서는 그 율법의 정한 것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가족 전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복이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왜 그 가정에는 복을 주셨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웃사가 죽고 난 다음에 벌어진 일로서 그제야 하나님의 궤를 사람들이 메고 옮겼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웃사가 죽고 난 다음 다윗도 사람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을 때 오벧에돔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집으로 궤를 옮기기를 허락했습니다. 그리고는 율법대로 궤를 옮겨가면서 만지지도 보지도 않으면서 맡은 일을 성심껏 수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셨고 기뻐하셨습니다. 석 달 만에 다윗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복을 받은 것은 그 결과였습니다.

다윗은 이 일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섬기는 일에는 용기 있는 선택이 필요함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성물에 대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셨고 말씀을 따라 행하는 이에게는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어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방법을 성경을 통해 드러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입니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그리 믿음직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야 그 믿음이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은 주님으로 하여금 거룩하게 만드는 믿음입니다. 그 거룩함으로 담대히 성소에 나아갈 담력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 은혜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좌우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전적은 은혜가 위로부터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임하시고 그 은혜의 놀라운 역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실천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새 계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엔 작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결단하고 시도하는 용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며 살겠다는 다짐과 실천적인 의지로부터 은혜가 더욱 충만해집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을 통해 그 의지와 실천을 이렇게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모인 백성들에게 축복하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자유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함께 한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축복할 이유가 있습니다. 함께 예배하는 자들에게 필요를 따라 공급하시는 손길을 잊지 마십시오. 단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기도하며 아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더욱 믿는 이들에게 할지니 서로를 돌아보아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것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부탁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께서 부탁하신 바를 기억하고 성취하려는 마음자세부터 이 일을 이루기까지 굳건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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