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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에 읽은 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인 부활절, 함께 읽으며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여기 올린 글은 빛과 소금 2000년 4월호에 게재된 헨리 나우웬의 글을 요약하거나 부분 발췌하여 옮긴 것입니다. 저작권의 문제가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게재된 글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활, 고난과 섬김에서 드러나는 생명의 빛

헨리 나우웬(빛과소금 2000년4월호)


성금요일 라르쉬 공동체의 남녀 장애자와 조력자와 벗들을 합하여 400명이 넘는 사람들 모두가 앞으로 나섰다. 모두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에게 사랑과 감사를 표시하는 일임을 아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십자가 주위에 모여 예수님의 발과 머리에 입을 맞추는 동안, 눈을 감은 내 뇌리에 지구행성 전체를 뒤덮고 거기에 못 박혀 계시는 예수님의 성스러운 몸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수많은 세기를 통해 전개된 인류의 엄청난 고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서로 죽이고 죽는 사람들,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 고향에서 내쫓기는 사람들, 대도시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 절망 속에서 서로에게 매달리는 사람들, 채찍질 당하고 고문당하고 화형 당하고 손발을 잘리는 사람들, 굳게 잠긴 감방과 지하 토굴과 강제 수용소에 갇힌 외로운 사람들, 부드러운 말 한마디나 다정한 편지 한 통, 따뜻한 포옹 한 번을 간절히 염원하는 사람들 - 어린이, 십대, 성인, 중년, 노인 모두가 고뇌에 찬 목소리로 부르짖고 있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의 행성을 뒤덮은 그리스도의 갈기갈기 찢긴 벌거숭이 몸을 생각하니 무서운 공포가 엄습해왔다. 그래서 눈을 뜨니, 얼굴에 고통의 흔적이 역력한 자크가 그리스도의 몸에 열렬히 입맞추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미셸의 등에 업혀오는 이반이 눈에 띄었다. 휠체어를 타고 오는 에디트도 보였다.

온전히 걷는 사람과 절름거리는 사람, 온전히 보는 사람과 눈먼 사람, 온전히 듣는 사람과 귀먹은 사람 모두가 십자가를 향하고 있을 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몸을 둘러싸고 거기에다 입을 맞추고 눈물을 쏟은 다음 예수님의 위대하신 사랑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고 천천히 돌아서는 인류의 끝없는 행렬 그것이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안식의 표지들이 서려 있었다. 눈물이 가득 괸 두 눈에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서로 마주잡은 손들, 정답게 팔짱낀 팔들도 있었다. 외토리로 번민하던 개개인이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고 자신의 입술로 감촉한 사랑 때문에 거대한 무리로 한 덩어리를 이루어 십자가 곁을 떠나는 모습이 내 마음의 눈을 파고들었다. 공포의 십자가가 희망의 십자가로 바뀌고, 고문당한 몸이 새 생명을 낳는 몸으로 탈바꿈하고, 갈라진 상처들이 용서와 치유와 화해의 샘으로 변한 것이다.

마지막 사람들이 나와서 무릎 꿇고 그리스도의 몸에 입맞춘 다음 떠나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정적, 무거운 정적이었다. 작은 공동체가 온 인류로 바뀌면서, 내가 평생토록 해야 할 말은 이것뿐임을 알게 되었다. "받아먹으시오. 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


세계의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다 새로운 시각으로 보이게 된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 안에서,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짐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시고 그분의 광대한 사랑을 인식할 수 있는 통로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분의 짐은 모든 인간의 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짐을 함께 지도록 요청 받을 때, 우리는 세상의 짐을 함께 지도록 요청 받는 것이다. 위대한 신비는 바로 이 짐이 가볍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궁극적 사랑을 알게 해주는 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사회적 관심사의 영적인 차원을 감지하게 된다. 가난한 자의 배고픔이나 옥에 갇힌 자들의 고문, 세계 각국에서의 전쟁의 위협, 우리가 도처에서 듣는 수많은 인간의 고통은 인간의 상처 가운데서 하나님의 상처를 볼 수만 있다면 그러한 비전을 소유한 우리에게 응답을 촉구하는 부름이 될 수 있다. 상처받은 하나님은 거절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짐을 지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오신 분으로 사랑의 얼굴을 보이심으로 우리를 매료하신다. 사람들의 고난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화목케 하시고, 치유하시고, 연합시키는 사랑을 알게 되는 한 방도가 된다.


끝에서 하는 시작

예수님의 손과 발은 여느 누구의 손과 발과는 달리 그의 육체적 현존을 나타내는 진실한 표적이다. 그것은 십자가 수난의 상흔으로 각인된 예수님의 손과 발이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에 있는 상처는 우리가 구원받는 방식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그 상처를 보고,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독특한 길을 알게 된다. 상처는 우리의 부활한 생명가운데 영광스럽게 변하기 마련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상처로 정체성이 드러남과 같이, 우리도 그러하다.


'나의 상처를 돌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상처가 나로 하여금 인간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거룩에로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선생으로 이 상처에 귀를 기울이며, 상처를 위로와 위안으로 삼으며, 극한 고통의 시기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상처를 싸매도록 내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처는 당혹의 원인이 되기 보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여정이다.(나는 이것을 영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편집자 주)


넘겨지다

예수님이 체포된 기사의 중심 구절에 각인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넘겨줌'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은 넘겨진 것이다. 어떤 번역에는 예수님이 '배반을 당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는 '넘기어졌다'이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준 것이다(막 14:10). 그러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 똑같은 단어가 예수님에게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쓰여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아껴두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넘겨주신 것이다(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이 구절 '넘겨줌'은 예수님의 삶에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 참으로 이 넘겨줌의 드라마는 예수님의 삶을 철저하게 분할하고 있다. 예수님의 삶의 전반부는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은 모든 활동에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분은 말씀하시고, 설교하시고, 치료하시고, 여행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넘겨진 직후부터는 일을 당하는 입장이 되신다. 그는 체포당하신다. 대제사장에게 끌려가신다. 빌라도 앞에 잡혀가신다. 가시로 관을 쓰신다. 십자가에 못박히신다. 예수님이 통제할 수 없는 가운데 일이 그렇게 되어져 간다. 그것이 고난의 의미이다 - 다른 사람들의 주도권에 따라 이끌려 가는 존재가 된다.



그리스도의 영광

부활은 단지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다. 부활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고난과 섬김에서 드러나는 생명이다. 예수께서 고난받으실 때의 기사를 보면 부활이란 고난의 한 복판을 꿰뚫고 나온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고난을 당하시는 과정으로 넘어가는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신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내로라"고 하신 말씀은 모세와 떨기나무 불꽃 사건 때의 말씀, 곧 "내가 그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말씀을 그대로 연상시킨다(출 3:1-6).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땅에 납작 엎드렸다. 그때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넘기우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같이 넘기워지는 과정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넘기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는 부활만이 아니라 고난도 들어 있다.


육신은 부활의 생명을 담고 있는 신성한 터전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은 무릇 인간의 몸이 신성하다는 사실과 모든 생명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매우 강력한 주장의 깊디 깊은 기초가 된다.


사람이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방식, 서로 관계를 맺고 보살피고 운동하고 자기 몸과 타인의 몸을 이용하는 방식이야말로 당사자의 영적 생활에 다시없이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심오한 신비는 하나님이 육신을 취하고 우리에게 오셨으며, 육신을 지닌 채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시고, 육신을 지닌 채 부활하시고, 당신의 육신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나는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됨으로써 비로소 내 몸의 중요한 의미를 온전히 알게 된다. 내 몸은 쾌락과 고통을 감지하는 사멸할 도구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고자 하시는 일종의 가정이다. 그리고 이같은 진리는 가장 기저를 이루는 윤리생활의 토대가 된다. 몸의 남용은 - 심리적인 것이든(일례로 공포감 주입), 육체적인 것이든(일례로 고문), 경제적인 것이든(일례로 수탈), 아니면 성적인 것이든(일례로 동성애 쾌락추구) 간에 - 육신을 지니고 하나님과 영원히 산다는 진정한 인간 목표에서 빗나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몸과 타인의 몸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은 진실로 영적인 행위다. 이는 몸을 본래 지닌 영광스런 존재형태로 좀더 가까이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이 한없는 쾌락의 샘이나 끊임없는 고통의 진원지 정도밖에 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고난주간을 지나 우리가 몸의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과 누리는 부활한 생명을 기대하면서 몸으로 기쁘게 그리고 품위 있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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