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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되나니!

믿음으로 되나니!

로마서 4장 18~25절

living by faith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조선시대 말기는 세계의 격동기였고 제국주의의 확장으로 힘 있는 나라가 약소국을 점령 지배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거대한 나라 중국도 외세의 침입을 받아 어려운 형국이었고 조선도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외세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일본은 항상 터무니없는 구실을 핑계로 한반도를 침범하였는데 조선 건국 100년만인 1592년 4월 13일 일본 해국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의 결과로 조선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일본은 조선보다 백년 먼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힘을 비축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래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장악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일 전쟁과 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습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외에도 주권국인 대한제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영일 동맹 및 일미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의 조약을 체결하며, 한국 진출을 본격화하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1905년 무력을 동반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한 데 이어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으로 대한제국의 배타적 권리를 차례차례 흡수하였습니다.


1909년 7월에 한국의 흡수가 일본 내각에서 결정되었고, 이에 1909년 10월 26일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게 됩니다. 그는 이듬해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명분삼아 일본 내에서 제국주의자들의 한국 합병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오히려 병합의 추진이 가속화되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영토로 강제 편입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 지역과 그 주민들을 '조선'으로, 대한제국의 황제를 '왕'으로 낮추어 불렀습니다. 결국 한반도 지역 전체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소위 일본 천황 직속의 식민 정부인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5년까지 35년간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항거하는 일도 잦았는데 1919년 3월 1일은 한민족이 일제 강점에 대항하여 비폭력 평화주의 만세운동을 한 역사적인 날입니다. 오늘로 96주년이 되었습니다. 삼일절은 민족이 단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을 상징하는 날입니다. 비록 외국의 힘을 빌려 스스로의 독립을 이뤄내지 못했지만 그 정신만은 그대로 계승되어야 하므로 오늘 말씀과 함께 한국 근대사에 대해 나누어 보았습니다.


때문에 을미년 올해는 일본 정부가 역사왜곡에 대한 깊은 반성과 이웃 나라를 강제 침략한 사건에 대해 깊이 참회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이는 일본의 아베정부가 계속 지향하고 있는 우경화와 군사력 확대에 대한 불신과 세계 각국의 염려를 줄이는 첫걸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일본에 대한 믿음이 적은 까닭은 반성이 없고 방어만 있기 때문이고 그 방어가 군사력 증강이라는 폭력적 수단의 비호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타인을 위협하고 폭력을 휘두른다면 ‘깡패’와 다름없습니다. 서로 신뢰가 형성되지 못하는 관계에서는 결코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누가 ‘깡패’ 같은 이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일상에서도 서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계속 스트레스를 받으며 믿지 못할 상황에서 서로 다투고 있겠지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어떻게 해준 음식을 먹고, 길에 다니며, 물건을 사고, 우정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순간순간을 살아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태어나면서 자라게 되는데 여러 발달 단계를 거쳐 성장하게 됩니다.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는 인간 발달에 대해 최초 태어나 1세가 될 때까지 처음 발달해야 하는 덕목으로서 기본 신뢰감이나 불신이라는 심리사회적인 요소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것은 배고플 때 먹여 주고, 쌌을 때 갈아 주며, 졸릴 때 재워 주고, 불편할 때 돌보아 줌으로써 아이들은 자신을 잘 대접해 주는 타인을 신뢰하게 되고, 타인이 자신을 그렇게 잘 대접해 주는 것을 보니 내가 믿을 만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되며, 나아가 이 세상은 내가 ‘앙~’하고 울기만 해도 모든 어려움이 해결되는 살만한 곳이라는 믿음을 형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양육자인 어머니가 아이를 친밀하게 대하고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게 대한다면 아이들은 신뢰감을 형성해 갑니다. 그러나 만일 부모가 부모역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서 아이를 대하는 방식에 혼란을 일으키거나, 일관성 없는 양육을 하게 되면 아이들은 불신감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도 이와 같습니다. 기본적인 신뢰가 바탕으로 있지 않으면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의 전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영적인 출생으로부터 시작되고 그것은 점점 자란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올바로 자라는가는 늘 점검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바른 신뢰에 기초한 것인지 불신(두려움)에 기초한 것인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바른 신앙-성장하는 신앙

75세에 자손을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들같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삶의 둥지를 옮긴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을 성장시켜 왔습니다. 삶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는 신뢰로 일관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늙어서 99세가 되었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성경의 일관된 이야기는 바른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믿음이 늘 바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도 들어있었고 두려움도 깃들여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사람이 두려웠고 암흑 같은 자신의 처지에 두려워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그 두려움이 기초한 믿음을 든든하고 바른 믿음으로 성장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계기가 100세 나은 아들 Isaac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사람 같았던 자신과 아내에게서 아들이 잉태되고 태중에서 자라게 되자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지킬 능력이 있는 유일한 신으로서 믿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주신 약속의 결과로 아들이 태어나고 그의 믿음은 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복 주시는 하나님에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신앙으로 자라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하나님에게 신뢰의 모습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 희생제사하는 장소로 가서 행동으로 보이는 신앙이었습니다. 그의 결단과 순종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인류 구원의 결단을 확정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6-18)


아브라함이 가진 바른 믿음은 계속 성장하는 믿음이었고 그것은 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일생에서 믿음은 계속 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계속 쌓여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은 일에 순종하고 믿음을 지키며 모든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과 연관 시켜 감사와 기쁨으로 대하다보면 자라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제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습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성장하는 믿음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우리를 향하여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가는 동안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질 것임을 이루셨고 그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지키심으로 우리는 신뢰감을 얻습니다.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주의 성령의 양육하심을 통해 우리는 믿음이 성숙되어 갑니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되고 자라갑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다는 이유로 우리를 의인으로 삼아주시고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사실 먼지같이 보잘 것 없는 것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믿음을 미쁘시게 보시고 자녀삼아주시고 돌봐주신다는 것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믿음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이러한 믿음으로 우리의 후대가 복을 얻고 가족과 교회 사회와 나라가 복을 얻게 됩니다. 그 복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 형상의 회복으로 개인과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삼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배경에는 기독교 신앙이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당시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나라를 빼앗긴 민족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통해 얻은 믿음의 씨앗들이 빼앗긴 나라,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그때에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독립운동을 했고 그것이 민족을 또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타국에서 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대한 변화와 회복을 위해 우리는 바른 믿음을 소망하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먼지 같은 믿음이 쌓여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또 더 자라서 반석 같은 믿음으로 성장성숙하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는 주님 주신 믿음으로 열매를 맺고 자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양심에 따라 바르게 살고 진리의 빛 가운데 전진하자는 기미독립선언서의 내용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바른 신앙인의 삶을 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견고해지는 믿음이며 동시에 열매 맺는 산 믿음입니다. 돌처럼 굳어지고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성장하고 익어가는 믿음입니다. 끝내 주님을 닮아가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심어두신 바른 신앙을 지키시고 잘 가꾸어 가시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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