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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 있는 새 교훈

권세 있는 새 교훈

A New Teaching And with Auth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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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장21~28절

21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Mark 1:21~28

21They went to Capernaum, and when the Sabbath came, Jesus went into the synagogue and began to teach. 22The people were amazed at his teaching, because he taught them as one who had authority, not as the teachers of the law. 23Just then a man in their synagogue who was possessed by an evil spirit cried out, 24"What do you want with us,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the Holy One of God!" 25"Be quiet!" said Jesus sternly. "Come out of him!" 26The evil spirit shook the man violently and came out of him with a shriek. 27The people were all so amazed that they asked each other, "What is this? A new teaching--and with authority! He even gives orders to evil spirits and they obey him." 28News about him spread quickly over the whole region of Galilee.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께서는 그다지 음식솜씨가 좋으신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음식에 길들여진 가족들은 큰 불평 없이 맛있다고 감사하게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런 음식가운데 하나는 가족들이 평생 먹었던 김치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김치는 독특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김치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어머니의 김치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김치는 정성과 사랑이 가득담긴 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추와 무를 고르고 찹쌀 풀을 준비하고 젓갈 두어 가지, 대파, 고춧가루, 생강, 마늘 등 갖은 양념을 준비하는 일들은 긴 시간과 정성을 드리는 일입니다. 남자들 셋과 함께 사시는 어머니는 그렇게 김치 담그는 일을 하셨습니다. 배추김치, 무김치, 총각김치, 싱건지, 동치미까지 계절마다 다양하게 먹던 김치의 맛, 금방 담은 겉절이, 오래 익혀 시어진 김치, 해를 넘겨 저장한 묵은지 등은 오랫동안 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지금도 생각을 하면서 입안에 침이 가득해집니다. 어머니의 김치에 모두 만족하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내와 살면서 제 입맛은 달라졌습니다. 십 수 년 아내가 만들어준 김치를 먹고 어머니의 김치와는 다른 맛에 길들여졌습니다. 지금은 아내의 김치가 제법 맛이 들어 가히 ‘어머니 표’ 김치라고 이름 붙일만합니다. 아내의 김치 역시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내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 손맛에 길들여져 김치에 대해 이제는 아무 불평이 없습니다. 맛이 있다고 칭찬 일색이고 본인도 자기 김치에 취해 좋아합니다. 어머니와 아내의 김치에 대해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기에 감히 김치에 권위가 있다고 표현해 봅니다.

권위-Authority

권위라는 말은 영어로 authority 즉 어떤 일이나 상황 속에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국어사전에서 권위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 혹은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이라고 풀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위는 주어지는 것일까요 내세우는 것일까요? 바른 권위는 아마도 밖에서 주어져 인정되는 것일 겁니다. 때문에 권위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겸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권위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저는 권위라는 말을 생각할 때 저자(author) 혹은 창조자(Author)를 생각합니다. 권위의 근원이 ‘만든 이’ 혹은 ‘창조자’에 있다는 점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권위는 창조자나 작가가 가진 무소불위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사렛 예수 vs 가버나움 예수

예수님을 우리는 나사렛의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본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나사렛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아버지 요셉과 함께 목수로 살았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다 예수께서 목수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사람들에게 더욱 알려지게 되고 요한이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히게 되자 요한처럼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그를 칭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규정하는 이름이었습니다. 비주류, 주변인, 낙오자, 천한 자를 뜻하는 나사렛 사람. 그런 곳에서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나사렛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를 어떤 눈으로 보았을지 짐작해볼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자랐던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하십니다.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성경에는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버나움이라는 곳은 집이 되었고 그 일대 갈릴리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 갈릴리 사람 중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가버나움의 예수’라는 말보다는 ‘나사렛의 예수’라는 말을 즐겼습니다. 아마도 가버나움도 예수님의 홈은 아니었나 봅니다. 아무튼 여전히 경(輕)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은 권위 있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거느리고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

사람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회당에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당은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집합소였고 모임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회당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장소며 건물입니다. 사람들이 회당에 들어가는 예수님과 따르는 제자들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요? “나사렛 예수가 뭐 하러 회당에 들어가는 거지?” “세례자 요한이 전했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더니 회당에서 그렇게 할 건가?” 갈릴리 근교에 소문이 있던 예수님의 등단에 사람들은 귀를 기우려 듣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사렛의 목수가 회당에 들어가 가르친 일도 놀랍지만 그의 가르침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는 자 같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던 서기관들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과연 어떻게 다르기에 사람들이 놀랐을까요? 서기관들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가지고 실제적이거나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 사변적이고 형식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일반사람들이 그 내용과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때로는 본질적인 내용보다는 외적인 이야기를 전했기에 중언부언하게 되었고 자신들이 경험한 것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계속 퍼 날라야했기에 메마른 심령들을 채워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현실적이고 체험적인 이야기 속에 중심적인 원리를 쉽게 가르치셨습니다. 중요한 생명, 사망, 영원에 관한 문제들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상황을 통해 풀어나가셨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은 삶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권세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니 더러운 귀신들에게 나오라고 명령하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서기관들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권위 있는 새 교훈

새롭고 놀라운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사람들은 넋이 나간 듯이 서로에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이전에 랍비들에 의해 장황하고 진부하게 전달되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놀라움은 가르침뿐만 아니라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계속 충격적인 놀라움이 지속되었습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져서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디다케 카이네라고 읽는 그리스어는 새 교훈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카이네 kaine는 유일무이한 새것을 말하는 말로 새것을 뜻하는 neos 네오스와는 차원이 좀 다른 말입니다. 이전에 없던 새것을 말합니다. 디다케는 가르침 혹은 교훈이라고 번역되는 말로 보다 풍성한 가르침으로 삶과 그 행동으로서 가르침을 뜻하는 말입니다. 단지 책상 앞에 앉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을 보이고 경험적 실제적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오늘 예수님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은 어려운 설교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참 하나님의 복음이 적용되는 것을 전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선택할 자유가 사랑 많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자유를 구속하고 깃든 사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더러운 귀신이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마귀의 일이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죄를 짓는 데 사용하도록 하는 것임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요일3:8)는 요한의 선언은 마귀가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게 살게 하려고 주님이 오셨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 겁니다. 주 예수님이 하신 일이 사람들에게 참 자유를 주고 하나님을 택하고 하나님의 참 백성, 자녀 되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에 입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요3:2)으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통해 변화된 우리의 삶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그 자유는 주 하나님을 택하고 선한 일을 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삶 곧 거룩한 삶- 성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권위는 밖에서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안에서 갈무리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이고 성령의 사람이라는 증거나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권위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으로 나타나고 겸비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삶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새로운 가르침과 권위 있는 삶이 우리의 삶 되기를 축복합니다.

맺으며~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사실 오늘 본문에서 처음 귀신들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멸시적인 이 말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예수님을 가볍게 여기고 싶은 사람들의 입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예수님의 권위를 높이는 말이 되었고 우리들에게 희망적인 수식어가 되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사람들의 말이 무색해진 것처럼 우리 같은 죄인도 거룩하게 변화될 것이기에 우리는 주님을 따라 새로 난 길을 갑니다. 희망도 없고 여력도 없는 삶 속에서, 앞길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빛이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우리도 갑니다. ‘예수쟁이,’ ‘규칙쟁이 감리교인’이라는 딱지가 붙는 것이 오히려 자랑삼을 만한 것임을 기억하고 끝까지 주님을 붙잡고 함께 가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여러분과 제가 주님께서 걸으신 놀랍고 새로운 길을 따라 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길에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십니다.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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