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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고린도전서 1:3-9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금부터 성탄 전 4주간동안 대강절 주간으로 예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절기입니다. 대강절은 영어: Advent,'오다'‘출현’라는 뜻의 라틴어 Adventus 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교회력은 대강절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는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시작으로 성탄절, 주님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심의 주현절,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마칩니다. 교회력은 계속 반복함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대강절 첫 번째 주일인 오늘부터는 새 교회력이 시작됩니다.

대강절의 특징은 기다림에 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선지자들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했고, 그 예언으로 백성들은 속히 주님이 오시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이 왔을 때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맞이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전혀 주님을 알지 못했고, 오히려 주님을 대적하기만 했습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메시아를 수많은 사람들이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이래 수많은 이단들이 출현했고, 지금도 여전히 교회를 혼란케 하는 이단들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고 날짜를 공포하여 사람들을 혼미케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다시 심판의 주로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알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리에 미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이 분명히 다시 오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여 말씀드리면 대강절의 특징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림입니다.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든, 죽어서 주님을 맞이하던 중요한 것은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럽게 주님을 만날 것인가, 아니면 심판의 주님으로 만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기다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모두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몇 가지로 생각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가장 귀한 보물을 얻는 것처럼.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어서 곧 재림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칭찬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 탄생을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시므온과 안나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에게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셔서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죽지 않으리라는 계시를 받게 하였고, 성전에서 기도하던 여선지자 안나에게는 메시아 도래를 전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은혜가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메시아를 보내주셨고 어린 메시아를 본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보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탄생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시므온은 그를 보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주 하나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제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 아기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 은혜는 고대하던 메시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허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임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누구 말처럼 예수가 정답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말솜씨 혹은 지혜나 은사가 넘치게 있어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예수만 못합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지식과 지혜를 얻습니다. 우리가 얻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값지고 큰 은혜임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값진 보물을 밭에서 발견한 어떤 사람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밭을 사서 보물을 얻게 되는 것처럼 예수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은, 우리는 그 날과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고귀하고 값진 보물을 얻게 되기를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견고한 믿음으로 기다립시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주님이 오시는 것을 반길 것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으로서 반가울 것이 없는 일입니다. 특히 원수 사탄에게는 영원한 지옥이 준비되고 멸망하게 되기 때문에 그에게는 끔찍한 일이 될 것입니다. 때문에 마지막 때에 그는 할 수 있으면 많은 이들을 미혹해서 하나님께 속한 이들을 믿음에서 돌이키도록 갖은 수단을 다 사용합니다.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다는 표현은 사탄의 급한 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 맹렬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는 우리의 작은 틈을 노리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점점 그 틈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이간하고 멀어지게 합니다. 그의 전략은 결국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19:9에 보면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어린양 혼인 잔치에 성도들을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이 땅에 재림하실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에는 미리 준비하고 있는 자만이 주님과 함께 잔치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전혀 예상치 않는 시간에 주님은 돌발적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때에 급작스럽게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에서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6~9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오직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주님을 맞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답은 성령(聖靈) 충만(充滿) 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겉모습은 비슷합니다. 모든 신부가 기름등을 준비한 것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모두 기름을 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의미는 신앙인으로서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경계하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디모데후서 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도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서 너는 돌아서라”하고 당부합니다. 경건의 능력이 있기를 원한다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를 위해 기도하고 그 열매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교제하며 기다립시다.

결국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용기 있게 순종하면서 사는 교제의 삶을 살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과 교제함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된다는 말은 우리의 응답함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때문에 우리의 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우리를 지으실 때 주신 자유의지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에게 주는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가진 성경이며 동시에 그 안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내면의 소리와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서에서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많이 간구하고 있으나 순종하는 것에 대하여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견의 능력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까닭은 순종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 같은 신앙에서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것은 어린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과 같지만 하나님과 교제하며 자라지 않는 미성숙한 신앙인으로 멈추는 경우가 많다는 점은 육신의 성장과 다릅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는 늘 주님과 교제하며 자라가야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에서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하면서 준비됩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화의 삶이 완성되기까지 계속됩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 같은 것이며 끝까지 견고하게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하면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믿음의 용사로 자라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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