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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구원에 이르는 회개 reversed 10/27/2014

구원에 이르는 회개

reversed 10/27/2014

시편 51편 1~10절

1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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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일을 한다면 삶을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언행(言行)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것이 생각나서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면, 그 순간은 자신의 모습이 비록 초라해지는 것 같지만, 놀랍게도 관계의 회복과 신임을 얻게 되는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뉘우치고 인정하고 시인하고 지은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는 모습은 성숙한 사람으로서 혹은 인격자로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백하고 시인하면서, 잘못된 것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향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으로, 참된 회개자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부르고 회개를 통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됨을 믿습니다. 즉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슨 목사의 말을 빌려 이야기 하자면 “회개의 특징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을 떼어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회개(悔改) 없는 구원은 없다

하나님의 구원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라는 첫 관문을 지나야 합니다. 성경은 회개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회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기독교의 구원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신약성경의 첫 배경에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죄를 용서하는 회개의 세례를 먼저 선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였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여기저기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회개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사도 바울도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회개를 선포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에 최초의 대중설교 가운데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을 때 “회개하십시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알 수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회개는 필수적인 단계이자 구원의 확실한 시작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알도록 하게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회개의 과정

시편 51편, 본문의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회개의 문제에 관한 고전적인 진술입니다. 이 시편의 배경에는 입에 담기조차 역겨운 다윗의 간통 사건이 있습니다. 슬프지만 우리의 인생도 얼마든지 이런 역겨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다윗이라는 개인의 범죄와 관련한 것만이 아닌 인간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될 때에 필연적으로 밟게 되는 몇 가지 단계 즉 회개의 과정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본성은 다 똑같기 때문에 다윗의 경험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죄에 대한 보편적 경험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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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3절)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인하는 단계입니다. 다윗은 간통과 살인교사라는 엄청난 죄를 지으면서도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비유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나 몰라라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마침내 다윗은 자신의 죄에 눈을 떴고 그로 인해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회개의 첫 번째 단계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직시(直視)해 본 적이 있습니까? 거울을 똑바로 세워 놓고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이제껏 어떤 생각과 행동과 말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살펴보십시오. 자신의 잘못은 간과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으려 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라고, ‘그만 따지라고,’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먼저 직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스스로를 솔직하게 바라보십시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권면을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매~우 싫어합니다. 삶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영화를 즐겨보거나 소설은 읽으면서도 정작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은 싫어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치부(恥部, shame)를 낱낱이 드러내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회개는 선택이 아닌 필수과정입니다. 그리고 회개에 이르는 첫 번째 단계는 죄를 자각(自覺)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일을 접고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제 쫓기듯 사는 일상을 잠시 중단하고 자신을 살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요 구원을 향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3절, 그리고 2절)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저지른 일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흔히 ‘죄’라고 부르는 행위는 사실은 그 본질에 따라 분류됩니다. 다윗은 그것을 세 단어로 나타냈습니다. 첫 번째는 죄과(transgression), 두 번째는 죄악(iniquity), 마지막은 죄(sin)입니다.



죄과(罪過)라고 번역된 말은 권위에 대한 의지적 반역, 특히 권위자(Author-조물주)에 대한 반항을 뜻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과를 저질렀으며 반항했음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죄과란 제멋대로 하려는 욕구, 자신이 원하는 일과 즐겨하는 일만 하려는 욕구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의도적 선택, 적극적 반항행위가 수반됩니다. 죄과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시인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나쁜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잘못을 인정합니다. 양심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한 저는 반역자입니다!”


죄악(罪惡)이란 일그러지거나 어긋난 행위, 왜곡된 행위입니다. 다윗과 같이 살인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해도 우리의 행위도 그와 마찬가지로 일그러지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악을 행합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칭찬받는 것을 배 아파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이런 생각은 그릇되고 어긋나고 일그러지고 추하고 사악한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지저분해지는 것입니다. (예, 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의 소행)



마지막으로 죄(罪)라는 것은 ‘과녁을 빗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죄는 인간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는 비껴 간 다른 방향의 삶을 살고 있는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선한 계획과 동떨어진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향은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지 않는데 있습니다. 중심을 잃고 정도에서 벗어나면서 의도된 목표에서 점점 더 벌어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의 행위의 본질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어디 다윗뿐이겠습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세 가지- 죄과(반역), 죄악(일그러진 행동), 죄(목표 이탈) -에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4절)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자신의 삶과 행동이 하나님의 목전(目前)에서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음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란 다윗의 고백은 백번 옳습니다(시51:4 “Against you, you only, have I sinned and done what is evil in your sight.”). 그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주님께 대한 범죄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심의 가책(remorse)과 회개(repentance)의 본질적 차이가 드러납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는 고백은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깨뜨리는 것’을 말해줍니다.



십계명, 도덕법, 고결한 인간성이라는 윤리적 보편 개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양심(良心)을 두셨습니다. 내면의 소리가 우리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세계의 질서와 규칙을 파괴함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은)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주님은)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51편 4절 하)

네 번째 단계는 자신이 어떤 변명이나 구실도 내세울 수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토로(吐露)하고 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무슨 핑계를 댈 수 있단 말입니까?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제 탓입니다. 제가 무슨 낯으로 죄를 덜어 달라고 아뢸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다윗의 고백은 회개와 죄의 자각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그랬듯이, 어떤 영적 지도자가 여러분의 삶이 이러저러하다고 지적한다면 여러분은 기꺼이 그러한 지적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만일 자신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하다면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합리화하려 들거나, 자신만이 옳다고 우긴다면 여러분은 회개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다윗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았습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 잘못을 깨닫고 시인합니다!” 이것이 참 회개입니다. 죄를 진심으로 깨닫는 사람은 이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마지막 단계는 자신의 본성이 날 때부터 악한 것임을 깨닫고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어느 순간 죄인은 이렇게 자문하게 됩니다. “어쩌다가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지? 내 안의 그 무엇이 이런 죄들을 짓게 만들었나? 시기, 질투, 미움, 악의, 탐욕, 욕망, 육욕, 정욕 ··· 이런 것들이 내 마음에 있구나.” 마침내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 이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 마음은 부패했구나. 내 마음은 악으로 가득 차 있구나.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 자체가 문제로구나.”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적 사상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바울의 통찰은 우리를 주님 앞에서 겸허하게 있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죄를 용서받는 일은 주님의 소관이고 우리는 단지 은혜를 입는 입장이어서 우리가 담당한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게 만드는 상황을 초래하는 내면의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포착한 다윗은 10절에서 통렬하게 탄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윗의 이 외침이 그 안에 들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성품 곧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 태어나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 깊은 곳을 만져 주셔야 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 이하의 고백은 자신의 깊은 곳에서 울려나온 성찰에 대한 통탄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빛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깊은 감사입니다.



지혜의 빛, 예수 그리스도

이와 관련하여 시편 51편에는 또 하나 매우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다윗은 6절에서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며 무릎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알겠다.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지혜라는 사실을. 나 자신을 조명할 빛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빛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고 확실히 보여줄 보다 큰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결을 이루며 거룩한 삶을 살아 내는 법을 알려주는 빛이 필요합니다.


이제 다윗은 다음 단계로 진입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내게 소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약 성경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외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한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는 구원하시는 것에 대한 탄원입니다. 여기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달라는 간절한 소원이 신약에서 우리의 주님이시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우리 주님은 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까요? 우리가 죄 짓는 삶과 회개하는 삶을 되풀이하다가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형벌을 받는 것이 안쓰러운 나머지 천국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몸을 입으신 것은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셔서 새로운 왕국을 세우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면 깨끗한 성품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품을 덧입히십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며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너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깨닫고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사람은 다시 태어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을 살아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의 핵심을 해결해주시기에 그는 자신 안에서 새로운 시각, 새로운 힘, 새로운 소망, 새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회개로 시작된 구원의 결말입니다.


마지막 정리.



나의 영혼에 대해 걱정하십니까? 나의 현재 상황이 어떠한지 아십니까?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까? 죄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제는 그런 마음자세를 가지는 것이 마땅한 때가 되었습니다. 날이 저물고 어두움이 점점 커가는 세대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삽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고 회개함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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